콩잎 김치는 정말 먹을 만하다. 시장 부근을 걸어가다 어귀에 콩잎을 파는 난전의 할머니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푸른 콩잎 한두 단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는 "정말 못 말려"라며 한 마디 하고는 바로 별미 콩잎 김치를 담근다.
콩잎김치 담그기는 간단하다. 보리쌀가루로 풀죽을 묽게 쑤고 다진 마늘과 푸른 고추와 붉은 고추 몇 개를 어슷하게 썰어 넣은 다음 소금으로 간을 맞추면 그만이다. 워낙 콩잎김치를 좋아하여 담그는 즉시 쌈을 사먹으며 묘한 풋맛을 즐기는 것이 나만의 즐거움이다.
콩잎 세 장을 손바닥에 겹쳐 얹어 보리밥 한 술 옆에 생마늘 한 쪽 올리고 된장이나 맛있는 멸치 젓국을 끼얹어 먹으면 상추쌈은 '저리 가라'다. 익지 않아 풋내 나는 콩잎으로 쌈을 싸 먹으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려면 빈한하지만 구차스럽지 않은 가문에서 태어나는 행운을 잡아야 하고 간사한 혀를 제압할 수 있는 내공을 쌓아야 비로소 가능하다.
노란 가을 콩잎 여름 밑반찬으로 변신
어릴 적 어머니는 가을이 오면 노랗게 변한 콩잎을 한 자루쯤 밭에서 따오셨다. 깨끗하게 씻고 마른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후 삼사십 장씩을 짚으로 묶어 된장독 속에 차곡차곡 쟁여두었다. 콩잎들은 된장의 기운을 빨아들여 스스로 숙성해야 이듬해 여름 밑반찬으로 거듭나게 된다. 된장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쉬'(구더기)가 생기는 게 탈이지만 그게 뭐 대순가.
된장독에서 바로 끄집어 낸 콩잎과 마늘종은 여름 반찬 콘테스트에 나가도 입선은 능히 할 수 있는 아담하고 우아한 것들이다. 실제로 식은밥을 찬물에 말아 숟가락에서 밥 반 물 반이 되었을 때 그 위에 된장 콩잎 한 장을 얹어 먹으면 그만한 앙상블은 다시없다. 거기에다 된장에 박아둔 마늘종을 곁들이면 피아노 삼중주(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에 비올라를 추가하면 사중주로 바뀌듯 '쟈쟈쟈 쟈안' 콩잎김치 사중주, 정말 근사하다.
여름 반찬을 나열하다 보니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알게 된다. 보리밥을 콩잎김치에 쌈을 싸고 끓인 된장 한 숟갈을 손가락 사이로 새나갈 정도로 얹어 먹으면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한데도 마늘종까지 들먹이다니.
허기야 오케스트라와 합창도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혼자서 노래하고, 혼자서 악기를 다루다가 둘이 모여서 소리를 내보니 더 크고 좋아 셋이 되고 넷이 되고 그래서 커진 것이 무슨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되었고 무슨 합창단이 되었을 것이다.
옛 선비들의 밥상은 일식 삼찬, 관직이 높은 벼슬아치들도 일식 오찬을 넘지 않았다. 임금도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삼베옷 맨발에 기우제를 지냈으며 소박한 밥과 반찬으로 환란을 이겨냈다. 요즘은 어찌 된 셈인지 밥상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야 직성이 풀리니 콩잎김치 이야기나 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고 송구스럽다.
서울 사람들은 안 먹는다는데…
이십여년 전, 주말마다 꿩 사냥을 다닐 때 일이다. 경남의 어느 산골로 들어갔다가 쫄쫄 굶은 적이 있다. 차가 기다리는 곳까지는 산을 하나 넘어야 하고 허기는 극에 달했다. 마침 외딴집 할머니를 만나 "밥 좀 달라"는 구걸을 하게 됐다.
"찬이 짠지밖에 없는데…." 할머니는 부엌에 들어가 가을콩잎 삭혀 둔 것을 쫑쫑 썰어 식은밥 한 술을 그 위에 놓고 먹다 남은 끓인 된장을 얹어 주셨다. 삭힌 콩잎에서는 볏짚이 썩는 두엄냄새가 나긴 했지만 냄새가 맛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시장이 반찬'이란 옛말이 조금은 작용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산골 외딴집의 삭힌 콩잎을 비벼먹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입에 침이 돈다. 선조 임금의 도루묵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참비름 나물이나, 나의 콩잎 김치나 모두 사촌간이다. 그런데 서울사람들은 이렇게 맛있는 콩잎을 안 먹는다네, 글쎄. "어떠노, 내 말 맞제."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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