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향(人材鄕) 구미는 금오산도 품었다. 금오산은 구미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이기에 '품었다'고까지 할까?
금오산은 등산객들에게 꽤 알려졌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한 번쯤은 가본 산일 게다. 우리는 그 동안 경북 여러 지방의 이름난 산들을 직접 가보았지만 구미 사람들만큼 내 고을의 산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경우를 접하기 어려웠다. 구미 사람들은 타지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멀리서 시야에 들어오는 금오산을 보고선 '구미에 다 왔구나'하며 표지로 삼는다고 한다. 그 만큼 금오산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금오산은 구미의 진산(鎭山)이다. 매우 신성스러운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인재향 구미를 낳게 했다는 금오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두대간은 태백과 소백준령을 거침없이 내달은 뒤 김천 땅에 이르러 여러 줄기를 갈라낸다. 그 한 줄기는 김천 대덕의 수도산이요, 수도산에서 다시 아래로 스미듯 완만하게 달리다 구미 땅에서 그 기백이 충연하니 바로 금오산(976m)이다. 금오산은 어찌보면 백두대간의 한 식구인 셈이다. 금오산은 서쪽으로는 김천의 남면, 동남으로는 칠곡의 북삼과 맞대고 있다.
금오산의 사계절 빼어난 생김새야 정평이 나 있다. 산세가 수려하면서도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았다. 그래서 사면이 가팔라 예부터 태벽(苔壁)이라 했다. 여름에는 한기가 차 오는 이들에게 산의 청량함을 안겨주고, 지금의 가을은 단풍이 오는 이들에게 화사함을 던져주고 있다. 금오산이 영남팔경 중 하나로 꼽히는 건 당연지사가 아닐까 싶다.
금오산을 찾는 많은 이들은 금오산의 앞쪽을 주로 간다. 금오산의 서편 자락인 수전마을이나 갈항마을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앞쪽과도 견주어 남음이 있으리. 금오산의 서쪽만 가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니 말이다.
우리가 금오산을 찾은 진정한 이유는 딴 곳에 있다. 여느 산처럼 '경치 좋네'라고 감탄사 몇 마디 던지고, 그냥 내려올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금오산에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다. 요즘 최고의 문화콘덴츠인 '스토리'가 넘쳐난다는 얘기다.
금오산은 태생부터가 흥미진진하다. 금오산의 금오(金烏)는 '금까마귀'다. 금까마귀는 예로부터 태양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상상의 새, 바로 삼족오(三足烏)를 뜻한다. 삼족오는 우리 역사에서 대고구려의 상징이기도 했다. 삼족오는 태양 자체 또는 태양의 정기를 뜻하는 동물이니, 금오산은 태양과 동격인 신성스러운 존재라고 옛 선현들은 이름지었다. 구미시는 '삼족오의 땅 구미'를 널리 홍보한다는 계획까지 세우고 있으니 금오산에 대한 구미 사람들의 자부심은 혀를 내두를 만큼이다.
금오산은 남숭산(南嵩山)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었다. 고려 때 산의 아름다움과 그 고귀함이 중국의 오악(吳嶽) 중 으뜸인 숭산(嵩山)에 비겨 손색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숭산은 중국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대사가 도를 닦은 산이요, 소림무술로 유명한 소림사가 있는 곳이다. 남숭산은 황해도 해주의 북숭산과 더불어 고려의 2대 명산으로도 꼽혔다. 지금도 금오산 자락에는 숭산이라는 이름의 마을도 있다.
금오산 자락에는 중국 명나라의 건국 시조인 주원장이 태어난 전설도 있다. 물론 허황된 이야기이지만 그만큼 숭산 금오산의 '유명세'가 낳은 전설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의 산 중 '태양'과 '숭산'이라는 고귀한 닉네임을 동시에 가진 산을 더 찾으라면? 아마 없을 것이다.
금오산은 옛 어느 날 금오산을 지나던 아도화상(신라에 불교를 가장 먼저 전한 승려)이 저녁 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금오산을 자주 찾다보면 그 능선의 오묘함에 시선이 고정된다. '王'자 처럼 생긴 것 같고,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워 있는 사람 모양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는다. 마치 거인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거인산(巨人山)으로 불리고, 흡사 부처님이 누워있다고 해서 와불산(臥佛山)이라고도 한다.
조선 초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는 금오산의 거인 형국을 보고, '임금이 날 산'이라고 예언했다고 알려져 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바로 금오산 아래에 위치해 있다. 생가는 바로 까마귀가 까치집을 빼앗아 앉은 형국(오수작탈형)으로, 이 기운을 받은 박 대통령이 나라를 위해 혁명을 일으킨 것이라는 이야기가 구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금오산은 그 산자락을 드리운 곳마다 각기 다른 얼굴도 가졌다.
선산 방면에서 보면 봉우리가 붓끝과 같아 필봉(筆峰)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여하튼 선산 땅은 인재향 구미의 중심지였다. 인동 땅에서 보면 귀인이 관을 쓰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귀봉(貴峰)이라 불렀다. 고관이 많이 배출됐다는 얘기다. 개령 쪽에서 보면 도둑이 무엇을 훔치려고 노려보는 것과도 같아 적봉(賊峰), 김천 쪽에선 노적가리를 쌓은 노적봉(露積峰)으로 불러 부잣집이 많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성주 방면에서 보면 바람난 여인의 산발한 모습과도 같아 음봉(淫峰)이라 해 관비가 많이 났고, 성주 기생이 이름난 것도 바로 이 산세 때문이라는 말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숭산, 삼족오, 팔색의 금오산. 금오산은 이것도 모자라 수식어를 하나 더 가졌다.
선산이 조선 성리학의 본향이자 연수처로 이름나게 한 정신적 지주가 바로 금오산이라는 것이다. 인재향 구미를 찾은 수많은 시인묵객들은 학문의 성지와도 같은 금오산을 찾아 성리학을 논하고,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수많은 글을 남겼다.
금오산이 자랑하는 명소로는 도선굴이 있다. 너비가 5m, 높이가 4m 남짓한 도선굴은 케이블카가 가서 닿는 산중턱의 바위벽 중간쯤에 뚫려 있는 자연 동굴이다. 신라 말 예언가이자 큰 스님인 도선이 찾아 도를 닦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도선굴이 금오산의 상징처럼 된 것은 고려 말의 충신이자 구미 정신의 가장 큰 어른인 야은 길재 선생이 은거한 곳이기 때문이다.
금오산은 야은 길재의 숨결이 지금도 느껴지는 곳이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시조로 고려왕조가 쓰러진 안타까움을 노래했던 야은은 세상사에 등을 돌리고 금오산 기슭에 은거, 여생을 보냈다. 야은이 그토록 거부했던 조선왕조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50년쯤 지난 영조 때에 이르러 그의 충의와 절개를 기리는 정자를 하나 세웠다. 바로 금오산 입구에 있는 채미정이다. 채미(採薇)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으로 중국 주나라 때 수양산에 은거해 고사리를 캐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선산의 사림들은 야은이 고려가 망한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 금오산에 은거하며 살았던 곳에 충절을 기리는 정자를 세운 것이다. 야은은 금오산의 도선굴과 대혈사 등지에서 학문에 매진했으며 조선조의 수많은 학자와 시인묵객들이 야은의 충절과 고매한 학문을 찾아 금오산으로 찾아오게 한 선지자인 것이다.
금오산은 중국 황하의 탁류를 견디는 선비의 스토리도 전한다.
"금오산 아래이되 금오산이 보이지 않고(烏山之下 不見烏山), 낙동강가이나 낙동강이 보이지 않는 곳(洛江之邊 不見洛水), 그곳이 천하의 명기(명당)이다"는 말이 있다.
바로 금오산 아래 지금의 오태동을 지칭한다. 풍수지리상 '소쿠리' 형국론이다. 금오산은 오태동을 포근히 감싸고 있고, 마을의 낙동강 쪽인 동쪽만 열어주고 있다. 그래서 시내에서 오태로 들어갈 때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소쿠리에 담긴 재화가 넘쳐흐르기에 마을에 오래 살기보다는 마을을 떠나 살아야 부자가 된다는 그런 이야기다. 이 오태동에 바로 야은의 묘소가 있고, 추모비도 서 있다. 선생을 모신 오산서원도 이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게 한다.
오태 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시내에서 오태로 넘어가는 입구에 서있는 '지주중류비'(砥株中流碑)이다. 유달리 크다는 것이 이 비석을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나, 여타의 비석과 달리 길가에 있는데도 길을 보지 않고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다. 이 비석을 세운 이는 안동 하회마을 출신인 겸암 류운룡이다. 겸암은 누구나 다 아는 서애 류성룡의 형이다. 겸암이 구미의 인동현감으로 있을 때 야은의 묘소가 있는 오태에다가 서원을 세우고 그 앞에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쓰인 '지주중류'는 흐르는 물속에 있는 지주라는 뜻이다. 중국 황하의 거센 탁류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위산의 이름이다. 비석의 뒷면에는 그 뜻이 실려 있으니, 해석컨대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조 있는 선비를 비유한 것이리라. 비석이 낙동강을 바라보고 선 까닭은 범람하는 황하를 연상케 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인 것이 아닐까.
그 절경과 고귀함, 야은 길재의 발자취를 안은 금오산은 낙동강의 뱃길을 관찰할 수 있는 병참기지와도 같은 구실도 했다. 금오산성이 그러하다. 정상부를 에워싼 내성과 산허리를 둘러친 외성으로 이뤄진 금오산성은 오랜 세월 금오산의 '눈'이 되어 산을 찾는 이들을 가려 받지 않았을까. 지금부터의 금오산 행은 겉과 속을 동시에 담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글 이종규기자 구미·정창구기자 사진 정운철
자문단 권삼문 구미시 학예연구사 구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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