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작리뷰] 펜트하우스 코끼리

"뭘 해도 채워지지 않아" 공허한 세 남자의 불륜과 집착 그리고 몰락

감상평을 쓰기가 참 쉽지 않은 영화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감정이입이 안 된다. 아무리 배경과 소재가 낯설더라도 그 속에 사람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공감하게 된다. 심지어 동물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서도 공감대가 이뤄진다면 울고 웃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소재와 소통방식에서 감정이입의 가능성을 배제해 버렸다. 그저 '훔쳐보기'의 욕구를 만족시킬 의도라면 모를까. 고 장자연의 유작이라는 점과 파격적인 정사 장면이 개봉 전부터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많은 매체들이 관심 속에 감상평을 썼지만 호의적인 글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상영시간 2시간20분은 상당히 길게 느껴졌다.

◆공허함에 몸부림치는 세 남자 이야기

영화 제목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소설가 김영하가 지어줬다고 한다. 제목은 그럴싸하다. 원래 펜트하우스(penthouse)는 아파트나 호텔 맨 위층의 최고급 주거 공간을 일컫는 말. 아울러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인 잡지의 이름과도 똑같기 때문에 은밀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은밀한 사생활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그렇다면 '코끼리'는 무엇일까? 사실 굳이 코끼리여야 할 필요는 없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 명의 30대 남자들이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추억 또는 내면의 순수를 상징하는 것이 코끼리다. 초등학교 시절 동물원으로 함께 소풍을 갔던 이들 3명은 '행여 길을 잃으면 코끼리 앞에서 만나자'는 말에 따라 동물원에서 코끼리를 찾아 헤맨다. 그게 전부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어린 시절 길을 잃었을 때 이정표로 삼았던 코끼리를 성공한 어른이 돼서 다시 찾아나선다'는 정도일까.

5년 전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그녀에 대한 집착으로 삶이 황폐해진 프리랜서 사진작가 현우(장혁), 붕어빵 찍어내듯 기계적으로 성형수술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한 성형외과 의사 민석(조동혁), 외국계 금융회사 펀드 매니저가 돼 12년 만에 친구들에게 돌아와 호화로운 펜트하우스에 살며 도박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진혁(이상우). 이들이 초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였던 3명이다. 그리고 현우의 친동생이자 성형외과 의사 민석의 아내인 수연(이민정)이 나온다. 어릴 적부터 병적으로 가꿔온 외모와 재수까지 해서 들어간 서울대라는 간판을 디딤돌 삼아 돈 많은 집 아들이자 성형외과 의사와의 결혼에 성공했다.

이들의 삶은 겉보기에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서울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아파트에 살며, 룸살롱에서 여자들을 양 옆에 끼고 고급 양주를 즐긴다. 집 안에 당구대도 있다. 자동차는 최고급 수입차이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고 외롭다.

◆섹스, 불륜 그리고 살인

사진작가 현우부터 만나보자. 헤어진 연인에게 다시 연락을 하고픈 충동을 이겨내려고 핸드폰을 쥔 손가락을 잘라내는 상상까지 할 정도다. 대마초를 피우면서 몽롱한 환상에 빠져 자신을 바라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현우는 주인공이자 관찰자이다. 망가져가는 단짝 친구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고, 그런 와중에 자신도 망가진다. 실연 때문에 황폐해진 현우의 삶을 조명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영화는 불친절하다못해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후반부로 넘어가며 현우의 스토리는 코믹과 잔혹극을 넘나든다. 병원에서 만난 신경정신과 의사 장 선생(황우슬혜). 자신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주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 현우는 한밤중에 병원에 찾아가 그녀를 데려나오고, 자신의 집에서 뜨거운 밤을 보낸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장 선생은 놀라운 비밀을 털어놓는다. 자신은 2079년 미래에서 왔으며, 멸종 위기에 처한 한민족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싱싱한 정자를 가지러 왔다고 말한다. 이쯤되면 장 선생의 실체가 무엇인지 짐작이 간다.

매일 여자를 바꿔가며 섹스에 몰두하는 성형외과 의사 민석. 자기 스스로도 '섹스 중독증'이라고 진단할 정도다. 민석에게 아내인 수연과 이룬 가정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런 민석을 사랑하는 여인은 연예인 지망생인 혜미(장자연)다. 아내와 헤어질 것을 강요하다가 민석이 떠나려고 하자 이혼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곁에만 있어달라고 애원한다. 영화 속에서 장자연과의 정사신은 노골적이다.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한 배우의 유작 속에서 그 배우는 면도칼로 손목을 그어 욕조에서 자살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굳이 안타깝게 숨진 배우의 노출 장면을 넣고, 피가 흥건하게 배인 욕조 속에서 숨져있는 잔혹한 장면을 넣어어야 했는지.

성공한 금융가로 등장하는 진혁은 민석의 아내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 사실을 뒤늦게 민석이 알게 되고, 아울러 아내의 오빠이자 친구인 현우가 이런 관계를 진작에 알고 있었음을 알고 분노에 치를 떤다. 영화는 치정과 복수극으로 변해간다.

◆펜트하우스를 벗어나지 못한 코끼리

영화는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가 하나도 제대로 담지 못했다. 고급 호텔과 오피스텔, 호화 성형외과를 오가며 벌이는 이들의 행각은 도발적이고 자극적이지만 그뿐이다. 메아리가 없는 공허함이다. 한국 상류층, 그리고 강남 남녀의 생태보고를 담은 문제작을 만들고자 했지만 안타깝게도 장르가 뒤섞인 모호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특히 중반 이후 영화는 현우와 장 선생의 러브 스토리를 담은 코믹 멜로에서, 불륜과 치정에 얽힌 복수극 드라마, 죽고 죽이고 사체를 몰래 벌이는 스릴러까지 치닫는다. 일관된 스토리도, 캐릭터 정체성도 없다. 논란이 됐던 정사 신은 8번이나 등장하지만 별 의미를 찾기 힘들다. 다만 영화를 구성하는 방식은 참신했다. 몽환적 장면을 통해 주인공들의 흔들리는 삶을 표현했고,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현실과 상상,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장면들은 색다른 시도였다. 아울러 기승전결이나 권선징악 같은 영화의 고전적인 틀을 깨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시도에 그쳤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적인 변화나 소재의 차별화를 시도하더라도 관객과의 호흡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코끼리는 펜트하우스에 가둬둔 채 영화가 끝나 버렸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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