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역사의 무서움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晉) 영공(靈公) 때 승상인 조순(趙盾)은 충신이었지만 군주인 영공은 패악했다. 영공은 조순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자객을 보내니 그의 충심을 알고 자객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몰래 습격을 해도 목숨을 바쳐 구해주는 사람이 있어 실패했다.

조순은 결국 망명을 결심하고 국경으로 도망을 갔다. 국경수비대에는 조순의 조카 조천이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내어 영공을 시해했다. 이후 조순은 궁으로 돌아와 성공(成公)을 세운 뒤 승상이 됐고, 그 동생들도 모두 대부가 되는 권세를 누렸다.

사관(史官) 동호(董狐)는 이를 두고 '조순이 영공을 시해했다'고 썼다. 조순은 당시 망명길이었고, 자신이 왕을 죽이지 않았다고 변명했지만 사관의 말은 추상같았다. 망명을 갔지만 국경을 넘지 않았고, 돌아와서 시해범을 처벌하지 않았으니 시해의 주모자와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조순이 고쳐주기를 부탁하자 동호는 시시비비를 그대로 쓰는 것이 믿을 수 있는 사기(史記)라며 승상의 권력으로 목을 칠 수는 있겠지만 고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자 조순은 국경을 넘지 않아 천추에 악명을 남기게 됐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이 일을 두고 공자는 동호직필(董狐直筆)이라고 칭송했고, 악평을 수용한 조순에 대해서도 훌륭한 정승이라고 평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친일을 하지 않았다, 혹은 소극적 협조라고 반발하고, 공(功)이 많으니 어느 정도의 과(過)는 덮어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언급된 인사의 후손이나 이해관계자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하지만, 국가 혼란이니 국론 분열이라는 말로까지 호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 후손들이 한행세를 하고 있으니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뜻인 것 같다.

우리나라는 36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일제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친일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역사에서 빼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한 시대를 읽는 텍스트이자, 청산해야 할 시대적 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는 공과(功過)를 더하고 빼, 평균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동호직필의 예에서 드러나듯 공은 공으로, 과는 과로 적는 것이 역사이다. 역사에 악명으로 기록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보여줘야 나라가 바로 선다.

정지화 논설위원 akfmcpf@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