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환 전 대구시청 도시계획 과장은 직장생활 대부분을 도시계획관련 부서에서 근무했다. 대구시 동구청과 중구청에서 6년, 도로관리사업소에서 1년, 수도국에서 9개월, 하수과장으로 1년을 근무했지만 이 역시 토목사업 부서로 도시계획 관련부서였다.
1943년 출생해 대구공고와 영남대학 토목과를 졸업하고 1966년 고용직, 1967년 2월부터 임시직으로 시청 공무원 생활을 시작, 1969년 정규직이 됐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달서천 환경관리소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했다. 그를 통해 현대 대구시의 지표 변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거리에 레미콘 트럭이 잘 안 보여 걱정입니다."
그의 첫 일성이었다. 줄곧 토목과 도시계획에 매달려온 사람답게 그는 건설로 경기를 가늠했다.
"사람이 일을 하려면 건물이 있어야 합니다. 집도 필요하고 사무실도, 다리도 있어야 합니다. 거리에 레미콘 트럭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도시가 역동적이라는 말이고, 경기가 좋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대구권역에는 34개 레미콘 공급업체가 있다. 2005년까지만 해도 연간 레미콘이 700만㎥가 공급됐다. 현재 공급물량은 450만~500만㎥에 불과하다. 그만큼 대구의 역동성이 줄어든 것이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이란 불규칙적인 일정구역의 토지를 규칙적인 택지로 정리하는 작업이다. 이때 종전 토지의 용도는 그것이 밭이든 논이든 하천이든 집이든 무시된다. 환지설계, 즉 토지 변경설계를 통해 사각형 토지로 환원되고, 지번과 지목(땅 용도)이 새로 지정된다. 이를 통해 비뚤비뚤하던 자연부락이나 토지는 네모로, 또 도로는 격자형으로 만들어진다. 대구시가 야심 차게 추진했던 제3공업단지, 동대구역 부근 개발, 대명동 지역 개발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토지를 매수해서 조성하는 성서공단 조성, 위천공업단지 계획 등도 큰 범주에서 토지구획정리 사업에 속한다.
대구에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66년부터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대구시 토지구획정리계가 토지구획정리과로 승격하면서 대대적인 토지구획정리가 시작됐다. 구획정리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절이라 토지구획정리과 직원(임시직 포함)만 해도 100명이 넘었다.
#불만 민원인 쇠스랑 들고 시청 찾아온 적도
김태환 전 과장은 1966년 제3공업단지 조성사업부서에 편성됐다. 미나리꽝, 논, 산, 밭, 집 등이 산재해 있던 땅 약 350만㎡(104만평)를 1966년부터 1971년까지 정리했다. 도로와 택지, 학교, 공원, 집이 들어갈 자리를 측량하고, 지번까지 매겼다. 등기 소유권이전 업무까지 담당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설계 업무도 맡았다.
제3공업단지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대규모 공장들을 유치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영세한 토지 소유자들에게는 힘겨운 일이었다. 그래서 체비지(토지 소유자들이 토지구획사업 시행자에게 제공하는 일정비율의 토지)를 조성해야 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김태환 전 과장은 제3공업단지 조성사업을 공직생활의 시작이자 어려움이 가장 많았던 사업이라고 회고한다. 토지조성 사업에 불만을 가진 일부 토지 소유 농민들이 낫으로 위협하며 측량을 방해했다. 장화를 신은 그대로 쇠스랑을 들고 시청 사무실로 찾아와 고함을 치기도 했다. 고통의 연속이었고 휴일과 밤낮이 없었다. 차라리 교육공무원으로 전직해버릴까. 당시엔 그렇게 전직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태환 전 과장도 하루 열두 번도 더 고민했다고 한다.
"힘들다고 그만둘 수 없었어요. 어렵다고 내가 일을 회피하면 누가 맡을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결국 그렇게 제3공업단지 조성산업에 5년간 매달려 완성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소규모 토지에도 작은 업체들이 건설되고, 도로도 축조되어 오늘날 제3공업단지가 된 것으로 회고한다.
제3공업단지 내 만평네거리는 원래 도시계획에 따르면 '8호 광장'으로 이름 붙여져 있었다. 만평네거리는 면적이 약 3만2천㎡(9천700여평)인데, 사람들이 거의 3만3천여㎡(1만평)에 이른다고 해서 '만평네거리'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근거가 돼 '만평네거리'가 됐다. 지금 '두류네거리'로 불리는 곳도 원래는 '7호 광장'으로 계획돼 있었고, 반월당은 '1호 광장'이었다.
#반월당 원래 '1호 광장'으로 계획된 곳
대구가 성장하면서 한때 변두리였던 '제3공업단지' 지역은 도시 중심부가 됐다. 문희갑 시장 재임시절 대구시는 다시 대대적인 도시계획정비에 나섰다. 이른바 '제7차 도시 재정비 계획'이었다. 이 무렵 김태환씨는 대구시청 도시계획 계장과 과장으로 근무했다.
"제3공업단지, 이현공단 등을 대구 외곽으로 옮기고 그 자리는 주거지역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이었어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위천공단'(약 925만㎡'280만평) 조성 계획이었다. 대구가 엄청나게 커졌으니 도시를 정비하고 공단도 정비하려던 계획이었다. 위천공단은 최첨단 시설을 갖춘 친환경 공단으로 낙동강 수질 개선에도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낡은 공단지역을 아무리 보수해도 잠재된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각 공장의 기계는 바꿀 수 있지만 하수처리, 주차 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워요. 첨단시설을 갖춘 새 공단을 만드는 게 옳습니다. 대구는 북풍이 불기 때문에 공단 지역이 북쪽에 위치하면 오염 물질이 시내로 날아듭니다. 제3공단 조성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은 외곽인데다 저지대였고, 땅값이 쌌습니다. 개발 당시엔 대구가 이처럼 급속도로 커지고, 자동차가 늘어날 것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했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옮겨야 할 때가 된 것이지요."
평생 '대구' 계획했기에 '대구 쇠락' 눈물
그러나 위천공단 조성사업은 '낙동강 오염을 염려'하는 부산'경남지역의 반대로 무산됐다.
"부산'경남 사람들은 우리가 위천공단을 개발하면 낙동강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했지만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낙동강 물을 더럽히면 대구가 먼저 피해를 보는데 우리가 그런 일을 할까요?"
김태환씨에 따르면 문희갑 전 대구시장은 대구시를 완전히 리모델링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대구를 친환경도시로 만들고, 외곽에는 대구를 먹여살릴 수 있는 최첨단 공단을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일이 제대로 안 되면서 대구가 쇠락하기 시작했다고 봐요. 계획대로 됐다면 대구는 지금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살기 좋은 도시가 됐을 것입니다."
김태환 전 과장은 "대구시의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지금쯤 최첨단 친환경 시설을 갖춘 공단이 조성되고, 제3공단 지역은 쾌적한 주거지로 변모하지 않았겠나"하며 아쉬워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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