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어느 날에 있었던 금융세미나에서 미국연방은행의 한 고위 관리는 "금융 개방은 여러모로 한국 경제에 좋다" "좋은 것을 왜 안 하느냐?"라는 취지로 금융시장의 조속한 개방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국내 금융학자 다수는 급속한 개방이 몰고 올 충격을 우려하면서 우리 경제에 좋은 것은 우리가 가장 잘 안다는 입장이었다. 필자 역시 미연방은행 관리의 주장이 와닿지 않았다. 우리 정부의 금융시장 개방 청사진도 장기간에 걸친 단계적 개방을 골격으로 하고 있었다. 금융 시스템의 취약한 구조는 그다지 개선되지 못한 상태였건만 일정에 따라 단계적으로 금융시장 개방은 진행되었고 얼마 후인 97년 가을에 외환위기가 터졌다. 그 직후 장단기 금융시장은 일정을 앞당겨 전면 개방될 수밖에 없었다.
외환위기는 아시아의 잘나가는 네 마리 용 가운데 하나로 칭송받던 한국경제를 졸지에 수술대 위로 보내버렸다. 용의 모습은커녕 이곳저곳 한꺼번에 수술이 필요한 병든 고양이 모습을 하고 있었다. IMF 병원의 외국인 의사들은 기업 부문, 공공 부문, 특히 금융 부문을 긴급한 수술대상으로 지목했다. 금융구조조정 과정에서 미국의 금융 시스템은 보고, 듣고, 배우고, 따라해야 할 표준이고 의문의 여지 없는 최고의 스승이었다. 그랬던 미국이 오늘날 어떤 상황을 겪고 있는가?
외환위기 2년 뒤인 99년으로 되돌아가서 한국의 외환위기 조기 극복을 축하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였다. 발표자 중 한 명은 뉴욕연방은행의 총재였다. 그의 발표는 고위 금융 관리의 깊은 통찰력을 느끼게 하는 내용들로 가득해서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그는 위기를 멀리하고 금융 안정을 이루는 데 필요하다면서 3가지 축을 강조했다. 건실한 기업지배구조, 잘 작동하는 시장 규율, 적절한 규제 및 감독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축은 기업과 금융 부문이 능력과 경험을 갖추고 책임경영을 펼치는 그러한 지배구조를 가져야 함을 말하고 두 번째 축은 공시제도, 회계 및 감사제도, 법제도 등이 잘 갖춰져야 하고 적절히 작동해야 함을 말한다. 세 번째 축은 규제 및 감독당국이 나날이 복잡다기해지는 금융 시스템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그 안정성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보수적이고 깐깐한 위험 관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렇다면 작년부터 본격 진행돼온 작금의 미국 금융위기는 과연 어느 축이 무너졌기 때문일까?
세계 각국의 금융위기를 비교분석해 본 금융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금융위기에 관한 한 역사는 되풀이되며 따라서 금융위기는 앞으로도 반드시 발생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주기적으로 확장 국면과 침체 국면이 반복되는 경기 순환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에 따라 금융불안 역시 주기적으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특히 주목할 점은 리스크에 대한 평가와 경제주체들의 대응도 사이클을 보인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금융위기 발생 원인으로 감시와 감독의 실패를 꼽지 않을 수 없는데 '몰라서'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하고 싶지 않아서' 감시와 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투자은행 직원들이 남들의 여섯 배가 넘는 보수를 받을 때 뭔가 크게 잘못된 것으로 바라본 사람은 없었고 다들 미국 금융의 높은 생산성이나 고부가가치를 거론하기에 바빴다. 규제 완화를 시대적 흐름으로 해서 유동성은 여유로웠고 없애버렸다던 위험은 그늘 속에 가려진 채 '그림자 금융시장'은 커져만 가고 있었으며 대공황의 교훈은 아득히 먼 옛날의 기억이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그리 머지않은 과거에 백신을 맞은 적이 있었고 그 효과는 있었으며 상황은 반전되어 이제 미국이 세계로부터 그리고 우리로부터 충고를 들어야 하는 입장이 됐다. 위기를 통해 알게 된 교훈은 모두 공유돼야 한다. 우리 지역의 금융권은 이러한 교훈들을 모두 공유하고 있고 실천하고 있을까? 부동산 개발에 대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은 모두 깐깐한 위험평가를 거쳤던 것일까? 미분양 상태의 수많은 아파트 단지들을 보면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고수익은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고위험을 수반한다. 그러나 고수익이 먼저 눈에 들어오면 고위험은 쉽게 가려지게 된다.
이병완 영남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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