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남녀의 사랑, 부부애 넘어 인간애로

■사랑이 떠나가면/레이클룬 지음/공경희 옮김/그책 펴냄

남자는 30대다. 그에게는 일정한 직업과 수입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 '잘난 인생'이라고 떠들어댈 것은 없지만 부족할 것도 없는 인생이다. 때때로 지루하지만, 그래서 평화롭다. 게다가 그는 바람둥이 기질을 갖고 있어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여성들에게 꽤 매력적인 남자로 통하기도 한다.

어느 날 그 평화로운 일상을 깨는 선고가 내려졌다. 30대 중반인 아내가 암에 걸린 것이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다고 믿었던 30대 부부의 일상은 이제 항암치료와 가슴 절제 수술, 암병동 찾아다니기로 채워진다.

소설은 댄과 카르멘 부부를 중심으로 가족, 친구들과 함께한 2년여의 투병 생활과 그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실제로 젊은 나이에 암으로 아내를 떠나보낸 지은이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사실과 허구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펼쳐간다.

화자인 댄은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은 별개라고 생각하며, 아내가 투병중임에도 다른 여자를 만나 끊임없이 바람을 피운다. 그런 행위를 한 다음에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을 질책한다. 때때로 그는 아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동정인지 사랑인지 의무감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어 고통스럽다. 그런 남편을 향해 아내는 말한다.

"나는 가슴이 하나뿐이고 암에 걸린 여자야. 아마도 몇 년 못 살 거야. 그 몇 년 동안 여전히 날 사랑하는지 아닌지 모르는 남자랑 사느니 차라리 혼자 살고 싶어."

위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사랑을 지고지순하게, 혹은 아름답게만 포장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바람을 피우고, 바람을 피우는 동시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남자를 통해 욕망과 죄의식,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깊숙이 파고든다. 남녀의 사랑이 단순한 부부애를 넘어 인간애까지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소설이 출간됐을 때 암 투병과 안락사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내는 "정말 다행이야.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다 봤고,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했어. 이제 그만하고 싶어. 내일!" 이라며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지은이는 네덜란드인으로 아내가 죽은 뒤 호주로 이사했다. 네덜란드, 스위스, 벨기에 등에서는 안락사를 법으로 허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안락사를 지지하거나 부추기지는 않는다. 소설은 다만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자의 내면과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의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할 뿐이다.

한 인간의 삶이 벽에 부딪혔을 때 그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사람들, 인생의 고통에 직면하지 않은 사람들, 철저하게 막다른 길에 몰리지 않은 사람들의 의견은 아무래도 '행인의 시각'일 것이다. '행인의 시각'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음을 소설은 보여준다. 408쪽, 1만3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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