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달구벌이야기](42)대구의 멋과 풍류

명창 박동진·권명화 등 배출한 전통예능 산실

◆ 대동권번

대동권번은 지금의 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 있었다. 1946년 설립되었는데, 그 모체는 달성권번이었다. 달성권번은 1927년 겸용산에 의해 설립된 사설이었고, 대동권번은 허가 받은 권번이었다.

신문광고를 내어 정식으로 기생 후보자를 모집했었다. 수업연한은 3년이었고, 수업과목으로는 춤'시조'풍류'가야금 병창이었으며, 판소리와 춤의 명인 박지홍, 가야금 병창에 배설향과 강태흥 같은 이들이 가르쳤다. 훗날 명창이 된 박동진은 이곳에서 조학진에게 적벽가를, 박지홍에게 흥보가를 배웠다. 또한 살풀이춤으로 명인이 된 권명화도 박지홍에게 배웠으며, 1995년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다가 불이 나서 대동권번은 문을 닫았고, 박지홍은 기생 몇 명을 데리고 남산동에 경북국악원을 열었다. 또한 배설향이 강사로 있다가 한국전쟁직후 세상을 하직했다.

권번(券番)은 조선시대 교방청(敎坊廳)의 후신으로 예기(藝妓) 양성소였다. 10대 초에 들어가 4, 5년 동안 춤'시조'창'가야금을 배웠고, 졸업시험에 합격해야만 놀음에 나갈 수 있었으며, 자연히 술 따르는 기생과는 대우가 달랐다. 또한 권번은 기생을 관리하는 업무대행사로, 등록된 기생을 요청에 따라 요릿집에 보내고 화대를 수금하는 일을 맡았는데, 그렇게 수금한 화대를 한 달에 두 번씩 기생들에게 지급하였다. 그런가 하면 권번은 전통 예능교육의 산실이었다.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능과목은 물론, 일반교양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내용으로 짜여 있었다. 그로 인해 해방 전부터 활동한 명창(名唱)이나 명무(名舞) 가운데는 권번 출신이 많았다.

'기생'이란 호칭은 우리 나라에서만 쓰이던 이름이다.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나 춤으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인들을 일컫는 말로 '예기(藝妓)'라는 말과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우리 나라 문헌에서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출전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기생을 부르는 별칭 '해어화(解語花)'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미인'을 달리 이르던 말이기도 하다. 당나라 현종이 비빈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해어지화(解語之花)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시대는 관기(官妓)를 기첩(妓妾)으로 맞아 사대부들이 집집마다 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는 관기(官妓) 제도를 한층 정비하였으며, 교방(敎坊)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이었다. 기생은 저마다 특기가 있었고, 그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달랐다. 춤을 잘 추는 기생은 무기(舞妓), 노래를 잘하는 기생은 성기(聲妓) 또는 가기(歌妓), 악기를 잘 다루는 기생은 현기(弦妓) 또는 예기(藝妓)라 하였다. 외모가 빼어난 기생은 미기(美妓), 가기(佳妓), 염기(艶妓) 등으로 불렀다. 특히 사랑하는 기생은 애기(愛妓), 귀엽게 여기며 돌봐 주는 기생은 압기(狎妓)라 하였다. 나이가 지긋한 기생은 장기(壯妓), 이로운 일을 한 기생은 의기(義妓), 기생의 우두머리는 행수 기생 즉 도기(都妓)라 불렀다. 그런가 하면 몸을 파는 기생은 창기(娼妓) 또는 천기(賤妓), 한물 간 기생 즉 퇴물 기생은 퇴기(退妓)라 하였다.

그와 함께 기생들을 관리하는 제도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기부(妓夫) 즉 기생서방으로, 종8품 벼슬인 액례'별감'승정원 사령'포교 같은 관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생을 첩으로 삼으려면 기생서방에게 돈을 내고 그 몸을 속량(贖良)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그 동안 먹여 살린 비용을 갚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또한 기생을 1패'2패'3패로 나누었다. 1패와 2패는 기생, 3패는 준기생으로 불렀는데, 능력에 따라 1패나 2패로 진급할 수도 3패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1패는 관기, 2패는 관기에서 첩이 된 사람 또는 관기에 준하는 예능의 소지자, 3패는 술이나 따르고 몸을 파는 천한 신분이었다. 1925년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조선 기생이 3,413명, 일본 기생이 4,891명으로 알려졌으나, 1948년 가무 음곡을 금지하면서 '접대부 제도'가 생겨 근대사에서 기생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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