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팔공산 한 귀퉁이, 어쩌면 세계적인 미술관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기초는 이미 만들어졌다. 조각가 정은기(68'사진) 전 영남대 교수의 집이 바로 그곳이다.
정씨는 1997년 약 3천300㎡(1천여 평)의 땅을 마련하고 작업실부터 만들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몰두할 수 있는 작업실을 갖고 싶었다. 팔공산, 청도, 경산 등지를 돌다가 만난 곳이 바로 팔공산 어귀. 조각가의 예술이 술처럼 익고 있는 곳이다.
그는 4년 전 정년퇴직하고 지금은 '조각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퇴직 후 자유로워지니 옛날에 하고 싶던 일들이 생각났어요. 마음 한구석 남아있던 예술가로서의 양심에 떳떳해지고 있습니다."
정씨는 서양화에서 나무 조각, 돌 조각을 거쳐 다시 나무로 돌아왔다. 1963년 홍익대 서양화과에서 공부하다 조각에 매료돼 김천 직지사 등을 돌며 목수와 석공으로부터 기초를 배웠다. 그는 단단한 강돌까지, 돌이라고 생긴 건 다 조각 재료로 쓴다. 그러던 그가, 다시 나무 솟대를 만들고 있다.
"솟대란 참 독특한 아이템이죠. 우랄알타이계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핏속에 흐르는 정서입니다." 솟대를 소재로 하는 작가가 많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기법들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내년 '하늘놀이'라는 제목으로 솟대 1천여개로 대형 설치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의 하루는 부지런한 농부와 같다. 새벽에 일어나 농사일을 한 후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닌다. 이때 마음에 드는 나뭇가지가 있으면 주워오거나 자른다. 집으로 돌아오면 가마솥에 나뭇가지를 삶아 껍질을 벗겨놓는다. 솟대를 만들기 위해서다. 오후 내내 솟대 만들기 작업에 몰두한다. 잠시도 손은 쉴 틈이 없다. 노동의 즐거움, 땀의 소중함이 담겨 있는 일상이다.
그의 마당엔 작은 조각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잘 정돈된 잔디밭에 작품을 하나 둘 내놓다 보니 자연스레 조각공원이 된 것. 첫째 아들 세용씨는 대구에서 영상설치미술가로, 막내 아들 덕용씨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컨템포러리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두 아들의 작품도 여기에 있다. 사실 두 며느리도 조각과 출신이다. 한 집안에 조각 관련 사람이 5명이나 된다.
돌을 이용해 분수를 만들고 그 물이 작은 연못으로 흐른다.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허투루 놓인 돌이 하나도 없다. 모두 작가의 의도가 숨겨진 배치다. 바위 위에 낀 이끼마저 작품의 일부가 됐다. 정씨는 이를 두고 '대지 예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본다.
정씨는 집을 지을 때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 없는 창조적인 집, 최소 200년 이상은 지속되는 집, 팔아먹을 수 없는 집.'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집이다. 집의 두 면을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본인이 직접 쌓았다. 팔공산의 돌과 가장 비슷한 김천의 돌을 가져다 썼다. 거실에 화강석의 자연스런 질감이 드러난다. 마치 불국사 석실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우리 집은 200년은 갈 테지만, 특히 돌로 쌓은 부분은 1천500년쯤 지속될걸요? 세상에 태어나 1천년 이상 흔적을 남기면, 그만하면 된 거지요."
3년간 집을 지으며 일하는 즐거움을 듬뿍 느꼈다. 그의 집에는 창조적이지 않은 것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조각공원과 이웃한 텃밭의 배추와 무, 고추는 원형으로 심어놓았다. 일자로 심는 것은 재미없단다.
좋은 바람, 반딧불이, 햇살 속의 집에서 자식을 거쳐 3대쯤 흘러가다 보면 세계적인 미술가도 바로 이 집에서 나올 수 있지 않겠냐며 조심스레 꿈을 펼쳐보인다.
사실 그는 집을 지을 때 미술관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 거실과 연결된 데크를 길게 늘린 것도 음악회를 열 수 있도록 객석을 만든 것이다. 가끔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여섯살때부터 지금까지 피아노를 치고 있는 부인 오금주(64)씨와 호흡이 잘 맞는다. 지하에는 이미 갤러리를 만들어두었다. 그의 돌 조각들과 솟대들이 평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공간이다.
지자체의 관심이 아쉽다. 행정적 지원을 조금만 해준다면 예술가들은 신이 나서 작품을 만들고 지역사회에 환원할 텐데 말이다. 자신의 집도 소중한 문화 인프라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먼 훗날, 이 집이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예술공원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꿈이 있어서일까. 집 안팎을 가꾸는 그의 손길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안상호 편집위원
shahn@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