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은 우리 역사가 증언하는 명장(名將) 중의 명장이다. 『삼국사기』에는 역사 인물을 소개하는 열전이 10권 있는데, 이 10권 가운데 3권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쓰여 있다. 그가 바로 김유신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그의 칼날에 수없이 많은 병사들이 쓰러져갔다. 그 많은 칼날 중 김유신이 가장 내리치기 힘들었던 칼은 어느 것이었을까? 사랑을 베어내는 칼날이 아니었을까?
경주시 내남면, 혁거세왕 사당인 숭덕전 맞은편, 작은 집 몇 채가 모여 있는 마을을 지나면 산 밑으로 논이 펼쳐져 있다. 이 논 가운데 탑의 기단부와 몇 개의 옥개석이 나뒹구는 천관사 터가 있다.
천관녀는 기녀였는데 소년 김유신과 서로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를 안 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이 "나는 이미 늙어서 밤낮으로 오직 네가 성장하여 가문을 빛내기만 바라고 있는데 너는 기생집에나 드나들고 있느냐"며 책망했다. 유신은 다시는 기방에 출입하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서약했다. 하루는 유신이 나갔다가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데 말이 옛길을 따라 천관의 집으로 가버린 것이다. 천관이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러나 천관을 보고 놀라 술이 깬 김유신은 타고 온 말의 목을 베고 안장도 버린 채 돌아가 버렸다는 이야기는 많이 회자되어 왔다.
말의 목을 베고 돌아서는 김유신을 본 천관녀는 무엇을 했을까? 난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신이 잘못하는 것 같았다. 내려서 '나 이제는 못 온다'고 하고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 가을. '얼마나 그가 마음이 약하면 그 말조차 못하고 돌아섰을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말 한 마디만 더 해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이기지 못할 결심이었나 보다. 김유신은 이후 차츰 더 결심을 굳혀 갔을 것이다.
그 어린 유신의 애절한 행위가 천관녀에게 통했을까? 천관녀의 사랑이 진정일진대 어찌 그 마음을 읽지 못하겠는가? 그 힘든 칼질은 천관의 가슴을 벤 것이 아니고 천관이 자신의 삶을 승화시키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짙은 사랑도 영원히 갈 수는 없는 것인지 모른다. 불타올랐던 '진실의 순간'으로 평생을 따뜻이 데우며 험난한 세상을 정화하며 살도록 하는 기억이 사랑일 것이다. 천관녀는 김유신의 뜻을 읽을 수 있었던 복 많은 여인이었으리라.
무슨 이유에서인지 천관녀는 김유신보다 일찍 죽었나보다. 그리하여 김유신은 그 집터에 천관사를 지었고, 참마항이라고 하여 말목을 벤 장소를 기억했다. 사실 김유신의 집터와 천관의 집터는 걸어서 20여분 거리가 안 되는 곳이다. 김유신은 평생 그 자리를 가까이에서 보며 살았다.
후세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유신의 마음을 이해한 것이리라. 더욱이 김유신의 이 칼이 필요한 시간에 사람들은 그 앞에 섰으리라. 유신의 이러한 칼질이면 어찌 삼국통일의 원동력을 얻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느새, 유혹이란 말을 배우는 시절에 왔다. 난 어려서 유혹이란 마귀같이 생긴 것인 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피해 갈 것이고, 절대로 내게 유혹이란 말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유혹이란 결코 흉측한 모습이거나 나쁜 일이 아니었다. 자기 길이 정해진 사람이 그 본질을 수행하는 데 들여야 할 시간이나 노력, 정신을 덜 가게 하는 것들을 모두 포함하여 일컫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내 길에서의 유혹이 다른 사람에게는 유익한 것이 되고 사회에 공헌이 될 수도 있다. 단지 길이 정해진 사람 그 자신이 가면 안 되는 길이라는 것일 뿐….
그러므로 정해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뿌리쳐야 할 유혹의 수가 많으리라. 공자가 나이 사십에 불혹(不惑)이라고 한 것은 바로 사십부터는 다른 것을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신이 말머리를 벨 때의 마음을 배워야 하는 순간이 인생을 살면서 어찌 한 번뿐이겠는가? 가을, 이제 내년을 준비하며 털어버려야 할 것을 다시 생각한다. 버리되 진지하게 고뇌하며 버려야 '선택'이 된다.
김정숙 영남대교수· 국사학과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한덕수 "24일 오후 9시, 한미 2+2 통상협의…초당적 협의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