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작 영화 리뷰] 2012

메시지는 없다, 지구멸망 과정 웅장한 그래픽에 압도당할 뿐…

눈이 즐거운 영화다. 살짝 감동이 밀려오려다가 그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말았다. 줄거리는 '지구에 종말이 왔는데 운 좋은 사람들만 살아남았다'로 정리할 수 있다. 2시간 40분에 육박하는 상영 시간은 두어 번쯤 시계를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매년 하나쯤 그 해를 대표할 만한 할리우드발 초대형 블록버스터가 나오는데 올해는 '2012'가 차지할 것 같다. 이유는 탄탄한 스토리나 빼어난 연기력 때문이 아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재난이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총동원된다는 점에서 한 표. 하지만 더 큰 기대는 하지 마시라.

◆2012년 12월 21일 지구의 멸망 시작

과학자 햄슬리(치웨델 에지오프)는 2012년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유는 이렇다. 태양이 유례없는 대폭발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엄청난 양의 뉴트리노(중성미자)가 지구로 쏟아진다. 다른 물질과 일체의 반응도 하지 않고 빛처럼 가볍고 빠르기 때문에 최근까지 존재조차 몰랐던 입자가 바로 뉴트리노다. 이 입자들이 지구로 쏟아지면서 전자레인지처럼 내부를 달구어서 지구가 끓어오른다는 가정이다. 지구에서 지각이 차지하는 두께는 마치 계란껍질처럼 얇다. 내부에 들어찬 핵과 맨틀이 부글부글 끓으니 지각쯤은 이마에 부딪힌 맥반석 계란껍질 꼴이다. 물리학이나 천문학적으로 허무맹랑한 이론이다. 아무튼 인도에 있는 지하 수km 깊이의 구리 광산에서 처음 징후가 포착된다. 비정상적으로 온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 지구 멸망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멸망의 이유가 무엇이건 중요치는 않다. 거대한 비주얼을 동원해 외계인 공격 따위는 딱총놀이처럼 시시하게 보일 만큼 초토화하는 지구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건물이 내려앉고 도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사람들은 마치 짓밟힌 개미처럼 '찍' 소리조차 못한 채 죽어간다. 단순히 도시 문제가 아니다. 핵폭탄에 버금가는 거대한 폭발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대륙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지리산만큼 높은 해일이 육지로 몰려든다. LA가 바닷 속으로 사라지고 히말라야 산맥이 바다 아래로 잠긴다. 에베레스트산은 마치 앞산처럼 봉우리만 삐죽이 남을 정도다. 지구 멸망이 도래했고, 주인공 가족들이 열심히 도망쳤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줄거리가 생각나지 않는다. 화면이 너무 강해 스토리를 압도했기 때문인지, 워낙 특징없는 스토리여서 기억할 게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화면에 압도당한 스토리

일단 주인공은 미국 정부를 대신하며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과학자 햄슬리와 이혼한 소설가 잭슨(존 쿠색) 가족이다. 어느 날 이혼한 아내와 함께 사는 두 자녀와 함께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캠핑을 간 잭슨은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다. 한때 물로 가득차 있던 호수가 바짝 말라있고, 동물들이 죽어있었던 것. 명색이 국립공원인데 철조망을 쳐 놓고 '출입금지'까지 붙여놓았다. 캠핑도 제대로 못하고 그곳에 주둔한 군인들에게 쫓겨날 즈음, 라디오 생방송을 통해 지구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 괴짜 미치광이 '찰리'를 만난다. 찰리는 지구의 운명이 다했으며, 이를 폭로하려던 수많은 사람들이 의문의 사고사를 당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지구를 탈출하기 위한 모종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고, 자신은 그곳으로 가는 지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여차저차한 과정을 통해 찰리의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된 잭슨.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가족들과 함께 탈출을 시작한다. 때마침 닥쳐오는 도시의 붕괴. 처음에는 자동차로 파괴되는 도시속을 뚫고 빠져나가고, 나중에는 경비행기까지 타고 도시를 벗어난다. 성형외과 의사인 아이들의 새아빠는 '놀랍게도' 비행기를 몰 줄 안다. 라스베가스에 도착한 가족들은 러시아의 부호가 마련한 수송기를 타고 지구탈출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중국 초밍계곡으로 향하게 된다.

이들 가족은 살아남기에 급급하다. 하기야 지구상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없으니 별다른 선택도 없다. 휴머니즘, 영웅주의 따위는 없다. 잭슨 가족을 대신해서 영웅 역할은 미국 대통령이 맡는다. 워싱턴을 떠나 중국으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1'에 탑승하는 대신 침몰하는 배를 지키는 선장처럼 백악관에 남아 뒤늦게(아주 뒤늦게) 지구인들에게 지구 멸망의 최후 통첩을 전한다. 그리고는 해일처럼 밀려드는 대서양의 물결 속에 종이배처럼 날아온 항공모함 '존 F. 케네디'가 백악관을 덮칠 때 함께 최후를 맞이한다.

◆굳이 메시지를 찾으려고 애쓰지 마시라

이것으로는 조금 부족했다고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는 판단했나보다. 뒤늦게(역시 아주 뒤늦게) 과학자 햄슬리는 휴머니즘을 주창한다. 노아의 방주를 본 따 건조한 대형 선박(이름도 '방주'라는 뜻의 아크(Ark)다. 아울러 소설가 잭슨의 아들 이름은 '노아'다)에서 함께 탄 세계 지도자들에게 방주의 문을 열어서 미처 탑승하지 못한 사람들을 더 태우자고 설득한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바로 세계 G-8 정상들이다. 세계에 수많은 국가들이 있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탔는지 여부는 영화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대한민국도 여기에 포함된다. 참고로 러시아의 한 부호는 가족 한명당 10억유로(1조7천700억원)를 주고 방주의 탑승권을 산다. 방주에 미처 못 타고 플랫폼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하고 탑승권을 산 사람들이다. 돈 없으면 지구에 멸망이 와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다. 이런 비난을 염두에 둔 것일까? 미국의 한 장관은 이런 말을 남긴다. "그 돈이 없었으면 방주는 짓지도 못했다"고. 아무튼 천문학적인 재산을 지닌 부호들만을 태운(아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지구상의 동물들도 함께 태웠다) '아크'호 3대는 히말라야 산맥을 마치 낙동강 제방 넘듯이 넘실넘실 밀려드는 태평양 위에 띄워진다. 몰래 방주에 승선한 티벳의 한 가족과 주인공 잭슨 가족 외에는 예전 지구에서 재산과 권력으로 '넘버 3'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만 수십만명을 모았다. 넘쳐나던 바닷물이 빠지고, 새 목표로 삼은 아프리카의 희망봉에서 새롭게 꾸려질 신지구의 역사. 다가올 새로운 지구의 역사가 어떤 '꼬라지'일지 안 봐도 뻔하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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