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국, 그리고 나]베트남의 고산도시 '달랏'

낯선 이와의 우연한 만남…평범한 여행지가 특별해지는 순간

"달랏을 즐기려면 달랏을 떠나라!"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폴란드인 친구에게 크로아티아 남부의 세계적인 휴양지 '두브로브니크'에서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마을 전체가 오렌지색 지붕으로 뒤덮인 동화 같은 유럽 마을이었다. 그러나 웬걸…, 실망스럽게도 친구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찍어온 베트남 중부의 고산도시 '달랏'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하!' 나는 너무나 뻔한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달랏이 아무리 '베트남의 진정한 자연미를 느낄 수 있는' 유명한 관광지라고 한들 나에겐 그저 우리나라 농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계단식 논밭과 파란 하늘과 가을바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유럽에서 나고 자란 그녀에게는 오렌지색 지붕 마을이 그런 것이다. '멋진 여행지'라고 하는 건 얼마나 상대적인가! 우리가 그리는 베트남에 대한 환상의 대부분은 아마 서양인들이 그려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베트남 여행이 아무리 좋아도 폴란드인 친구에게 좋았던 만큼은 아닐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 호찌민과 하노이 같은 볼거리'즐길거리 많은 대도시들 말고는 이름 쟁쟁한 '나짱'이니 '달랏'이니 하는 곳들이 대개 나에겐 그저 그랬다(물론 '하롱베이'처럼 절대적으로 멋진 곳도 있다). 특히 '달랏'이라고 하는 도시가 왜 베트남 여행의 필수 코스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달랏에 도착한 그날 우리의 소감은 그러했다.

버스에서 내린 관광객은 달랑 우리 둘뿐(당시 나는 친구 '차차'와 베트남 여행을 하고 있었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의 달랏에는 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이곳에 온 것을 정말로 후회하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호텔에 손님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그리고 호텔 방문이 잠기지 않는다는 것, 설상가상으로 골목으로 난 커다란 네 짝 유리문에도 잠금장치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상황이었다. 여자 두 명이 낯선 나라 낯선 도시의 이름도 모르는 호텔에서 안전장치 하나 없이 밤을 보내야 할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독이 풀리지 않은 지친 몸으로 장롱, 소파, 책상 등등 방안의 모든 가구들을 힘껏 옮기기 시작했다. 방문을 막고 창문을 막았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달랏은 베트남 사람들의 신혼여행지로 더 유명한 곳이다. 교통이 편리한 중부의 해발 1,500m 럼비엔 고원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1년 내내 무더운 베트남에서 더위를 피해 휴가를 즐기기에 이만한 곳도 없을 것이다. 작은 규모의 도시 한가운데엔 '너무나 신혼여행지답게도' 뱃놀이하기에 좋은 쑤언응언 호수가 있고 조랑말이 끄는 꽃마차가 관광객들을 태우고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빙돌아 준다. 그리고…, 그게 다다. 우리는 심심병과 실망병에 걸려 우울해 하다가 '달랏을 즐기기 위해선 달랏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것 역시 여행의 법칙이다)'을 생각해 냈다. 여행의 재미는 가이드북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가장 평범하고 가장 일상적인 곳에 숨어있는 법이다. 우리는 학교에 가기로 했다. 서늘한 기후 덕에 달랏에는 학교가 많았고 한국어과가 있다고 알려진 달랏대학교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고등학교 교문처럼 수수한 달랏대학교 정문이 나타났다. 캠퍼스 안에는 울창한 숲길 사이사이 납작한 건물들이 숨어있었다. 두꺼운 책들을 한아름씩 가슴에 앉고 지나가는 여대생들이 정겹다. 우리의 달랏 여행에도 드디어 흥미진진한 사건이 생길까, 야릇한 예감 같은 게 밀려왔다.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 작은 키에 동그란 얼굴의 남학생.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니 기억하기엔 좀 힘든 베트남 이름의 서글서글한 눈매와 진지한 말투를 가진 건강한 청년. "실례합니다만 한국인이세요?"

낯선 도시에서 낯선 남자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우리의 반응은 어이없게도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네! 한국인이에요!" 제발이지 이 심심한 여행지를 견디기 위해서는 황당무계한 사건이라도 생겨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혹시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걸까 싶어 처음엔 조금 경계했지만 성격 좋은 남학생은 순수한 마음으로 외국인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학교 앞 분식집에서 '베트남 대학생들이 먹는 밥'을 사주었다. 그리고 베트남 남학생들이 우글거리는 자기네 하숙집을 구경시켜주겠노라고 했다.

이쯤에서는 다시 경계경보가 울린다. 아무리 밥도 사주고 친절한 현지 청년이라 해도 뭐가 숨어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소굴까지 따라 들어가도 될까. '삐뽀삐뽀삐뽀….' 머릿속엔 사이렌이 마구 울렸다. 하지만 우리는 따라갔다. 모두 심심한 달랏 때문이다, 삐뽀삐뽀삐뽀….

낡은 하숙집 대문에서 남학생 한 명이 우리를 발견하더니 놀라서 뛰어 들어갔다. 곧이어 베트남말로 마구 떠드는 소리, 이 방 저 방 우당탕탕 뛰어다니는 소리 같은 게 들렸고 10여명의 하숙집 남학생들이 모두 뛰쳐나왔다. 이영애라도 발견한 양 난리가 났다. 우리는 맨발에 늘어진 체육복을 입고 통기타를 멘 전형적인 하숙집 남학생들에 둘러싸여 밤이 가는지도 모르고 한국 노래, 베트남 노래, 팝송까지 전 세계 가요를 섭렵하며 떠들썩하게 웃어댔다. 늦은 밤 남학생들은 정겨운 시골길을 줄서 걸으며 우리를 호텔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지금 우리에게 베트남 최고의 여행지는 두말할 필요 없이 '달랏'이다.

미노(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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