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행엔 공식이 있다. 기준은 계절이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연의 생태와 초목의 변화는 결정적으로 자연에 의해 좌우되니까. 봄=진달래'철쭉, 여름=계곡'신록, 가을=단풍'억새, 겨울=눈꽃산행. 여행사들의 산행 일정표도 대체로 이 패턴에 따른다. 무언가 허전한 느낌. 무얼까. 이 공식의 틈새는? 아마도 섬을 간과한 일일 것이다.
익명성과 은둔을 특징으로 하는 섬은 계절의 영향에서 육지의 산들보다 비교적 자유롭다. 철마다 치장을 바꾸는 육지와는 달리 두어 번 빗질과 옷매무새를 추스르는 것으로 계절단장을 끝낸다. 계절산행의 틈새에서 2%를 꽉 채우는 묵직한 존재감, 이것이 섬 산행의 묘미가 아닐까.
◇통영 한려해상공원 중심에 위치
청정바다와 다도해가 어울려 절경을 이루는 경남 통영의 한려해상공원. 그 중심부에 동서로 길게 뻗은 두 섬이 있다. 사량도다. 휘하에 11개의 섬을 거느렸다. 중심부 3곳은 유인도, 나머지 8곳은 발길이 닿지 않은 무인도. 사량(蛇梁)이라는 이름은 상도와 하도를 가르는 물길이 뱀처럼 구불구불해서 붙은 이름이다.
대구에서 남해고속도를 2시간 30분을 달려 고성에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사량도로 향하는 유람선에 올랐다. 오늘 우리 안내산행팀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대구에 거주하는 외국인 두 분이 산행에 동행했다. 한분은 영어강사 마티(46), 또 한분은 주한미군 가족 멀라니(29'여).
이들은 외국인들끼리 만든 '여행자클럽'회원들. 대구 주변의 산들은 이미 섭렵하고 외곽으로 지평을 확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해무(海霧)가 살짝 드리운 바닷가. 가을바람에 파도가 잔잔한 물결로 일렁인다. 다리오 선착장에서 20여분을 달려 내지항에 도착했다. 한적한 섬마을의 미니 부두가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어구를 정리하는 아낙네들과 어촌마을의 풍경이 더없이 정겹다. 해풍이 실어 나르는 섬 공기를 만끽하며 일행은 산으로 오른다. 출발점이 바닷가인 탓에 해발(海拔)산행을 경험하게 됐다. 버스나 케이블카로 거저먹는 중턱산행이 아니라 바로 바다를 딛고 오르는 오리지널 해발산행 말이다.
◇가파른 등산로 조심해야
해발 397m의 지리산. 타지에서는 동네 뒷산쯤으로 여겨지겠지만 산꾼들 사이에서는 산세 험하기로 악명이 자자하다. 뭍의 웬만한 1,000m 고지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다. 경사도 30, 40도를 넘나드는 가파른 등산로와 해안절벽 위를 위태롭게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반부터 포기자가 속출했다. 심장이 불편한 멀라니도 중간에 등산을 포기하고 해안일주도 도보로 '종목'을 바꾸었다. 산은 일행에게 호된 신고식을 요구한 끝에 겨우 정상을 내주었다. 산행시작 1시간 30분만이었다.
코발트블루위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그 사이를 오가는 여객선들. 물새들의 하얀 비상. 비경 앞에서 언어는 늘 거추장스럽다. 수사(修辭)는 유한하고 형상화의 소임엔 늘 부족하다. 누구라도 이곳에 서면 이곳이 왜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지 쉽게 이해가 된다.
다시 옥녀봉 쪽으로 진행한다. 20분쯤 걸었을까. 촛대봉이 암릉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첨탑처럼 뾰족한 봉우리에 섰다. 왼쪽으로 내지항이, 오른쪽으론 금평항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다와 숲과 항구의 하모니는 해무 속에서 멋진 실루엣으로 펼쳐진다.
촛대봉에서 불모산으로 향하는 길은 설악의 공룡능선을 연상케 한다. 억센 물고기의 등지느러미처럼 날을 세운 능선을 따라 걷노라면 300m급 산에 어떻게 이런 암릉이 형성되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등산로 바로 밑은 시퍼런 바다. 실족은 바로 인명사고로 직결된다. 비경과 공포의 양립(兩立)은 이곳에도 있다. 마티도 절벽 끝에서 감탄사를 뿌리며 원더풀을 연발한다. 애틀랜타 출신인 마티. 고향엔 대부분 평원뿐이어서 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고 말한다.
◇슬픈 전설 간직한 옥녀봉 능선 명성
불모산을 내려서면 산들도 살짝 높이를 낮추다 메주봉, 톱바위를 지나면서 다시 한 번 롤러코스터를 탄다. 이 거친 능선은 옥녀봉에서 정점을 이룬다. 옥녀봉 능선은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누구는 설악산의 용아능선에 비교하기도 하고 오대산의 만물상에 견주는 사람도 있다.
하산길 입구까지 1㎞가 채 안 되는 구간이지만 이 구간 안에 협곡, 절벽, 암봉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반보(半步)차이로 생사가 갈리는 칼날능선에서는 종교의 본질과 만나고, 로프 하나에 의지해 절벽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등산은 수행으로 바뀐다. 이 와중에서도 좌우 섬의 비경은 쉴 새 없이 펼쳐진다. 환상적 암릉과 바다 조망은 한순간도 오감(五感)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경쾌한 암릉의 레이스는 옥녀봉에 와서 마침점을 찍는다. 옥녀봉은 자신을 겁탈하려는 아버지의 손길을 피해 몸을 날린 옥녀의 전설이 서린 곳. 처녀의 한을 달래기 위해 등산객들이 하나씩 날라 온 돌들이 제법 큰 돌무덤을 이루었다. 미(美)와 한(恨)은 통하는가. 봉우리 비경의 감동이 클수록 옥녀의 슬픔이 더 짙게 다가온다.
옥녀봉을 내려서 일행은 대항해수욕장 쪽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갈림길에 서면 아랫섬 쪽 풍경이 눈에 잡힐 듯 가깝다. 두 섬 사이를 이어주는 동강(桐江). 바다에 강 이름이 붙은 까닭은 아마도 뭍을 지향하는 섬사람들의 작은 소망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두는 싱싱한 해산물을 안주삼아 하산주를 즐기는 산꾼들의 수다로 소란스럽다.
대항항에서 귀가길 행장을 꾸린다. 섬 자락 너머로 석양이 물들기 시작한다.
배는 다시 섬을 나온다. 한나절 우리를 받아들였던 섬은 그 자리에서 말없이 우리를 배웅한다. 우리가 걸었던 등산루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배가 통영 앞바다를 지나올 무렵 산길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잠시 후 원래의 한 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섬에도 계절이 있기는 하다. 단풍이니 억새니 하는. 그러나 코발트블루의 색감에 여객선의 포말에 모두 희석되어 다시 본래의 섬만 남게 된다. 비경이 계절을 몰아냈을까. 섬이 가을을 삼켰을까. 섬과 계절의 부조화, 마티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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