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우유떡

우유가루, 밥 할때 함께 쪄내면 우유떡

우유떡과 개떡은 둘 다 맛이 없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맛이 없는지를 가려내라는 시험문제가 출제됐다면 답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무맛의 범인은 사카린이다. 사카린 10환어치가 작은 숟가락 한 숟갈 정도는 되었지만 돈 없는 농촌에선 그것조차 마음대로 사지 못했다. 단맛이 빠진 떡은 정말 맛이 없었다.

초등학교 삼 학년 때였나. 육이오전쟁이 터지고 얼마 있다가 미국의 잉여물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대표적인 것이 슈바이처 모자로 불리는 화이버와 마분지 통에 들어 있는 드라이 밀크였다. 우유는 동네 단위로 배급됐다. 배급 날은 동네의 치마 두른 아녀자와 검둥이 흰둥이 할 것 없이 개들까지 다 모여 인산견해(人山犬海)를 이뤘다.

여름모자인 화이버는 남정네들에게 배분됐다. 어찌나 흔했던지 둥근 공 모양으로 생긴 것만 헤아려보면 몇 사람이 들에 나와 일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교하인(橋下人'거지)들도 그걸 쓰고 다녔으니까.

##가루우유 끓여 먹으면 어김없이 설사

당시 농촌에선 우유 먹는 방법을 몰랐다. 시골 아낙들은 물에 우유를 넣고 펄펄 끓여 아이들에게 한 대접씩 돌렸다. 지방기가 빠진(non fat) 우유였지만 시골 아이들의 나물 전용 위장은 미국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유를 마신 다음날 아침에는 집집마다 변소가 만원이었다. 이 집에서도 "젠장", 저 집에서도 "젠장, 설사만 했네"란 불평이 쏟아졌다.

우유는 정한 날짜에 어김없이 동사무소 마당에 도착했다. 젖(우유)과 꿀(설탕이나 사카린)이 동시에 배급되었으면 고향 마을도 모세가 지팡이로 가리켰던 이상향인 가나안 땅이었을 텐데 꿀이 없어서 그러질 못했다. 집집마다 우유는 쌓이기 시작했으나 먹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누가 "도시락에 우유 가루를 넣고 밥할 때 함께 쪄내면 우유떡이 된다."고 알려줬다. 집집마다 밥할 때마다 우유떡을 쪄내기 시작했다. 처음 한두 번은 몰라도 우유떡 역시 외면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유떡은 뜨거울 때는 약간 부드럽지만 식고 나면 차돌멩이로 변했다. 아무리 강한 이빨을 가졌어도 깨물어 먹지는 못했다. 쉬는 시간에 교실 벽에 붙어 해바라기를 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딱딱한 우유떡을 끄집어내 갉아 먹곤 했다. 성질 급한 친구는 잘못 깨물어 흔들거리는 유치(幼齒)가 빠져나가 피를 흘리며 우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니까 우유 떡이 치과의사 일까지 맡아 본 셈이다.

##절구로 찧어야 먹을 수 있을 만큼 딱딱

전쟁이 터졌어도 다행히 우리 마을은 피란을 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가까운 영천 쪽에도 빨갱이들이 쳐들어 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밤에는 지역 빨갱이들이 산속에 숨어 있다 내려와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기도 했고 물정에 어두운 전투기들이 강변에 흰 포장을 치고 살고 있던 피란민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리고 간 사고가 있었으나 비교적 평온했다.

다만 우리 학교를 군에 징발당해 교실에서 공부할 수 없었다는 게 섭섭하고 불편했다. 처음 몇 달 간은 하양 성당 옆 묏등에서 칠판을 들고 가 야외수업을 받았다. 그러다가 허(許)씨 문중의 양사재(養士齋)란 재실을 빌려 그곳에서 가교사가 마련될 때까지 국어와 산수를 배웠다.

그 제실 북쪽에는 오래된 나무절구가 놓여 있었다. 어느 날,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딱딱한 우유 떡을 넣고 몇 번의 절구질을 하니 희한하게도 잘게 부서져 더 이상 이빨이 빠지는 고통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의 절구질 장난을 눈여겨보신 선생님은 다음 과학 시간에 지렛대의 원리를 설명하시면서 '절구 또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의 산물'이라고 말씀하신 걸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먹기 사나웠던 우유떡에도 과학이 붙어 있었다니. 갑자기 한때 유행했던 광고 카피 생각이 난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유떡도 음식이 아니라 과학이구나.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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