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촉망받던 의대생서 사진작가 변신 박진우씨

"사진으로 담지 못할 메시지가 없죠"

팔조령을 넘어 폐교된 초등학교 맞은편 길로 접어든 후 차 한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사진작가 박진우(51)씨의 전원주택이 나타난다. 400㎡(120평)의 널찍한 집 1층은 작업실, 2층은 주거 공간이다. 박씨의 집은 언제 찾아도 운치가 있지만 특히 가을과 궁합이 잘 맞다. 가을이면 집 앞에 그림처럼 떠 있는 저수지가 뒷산 단풍을 한껏 머금고 작업실 한쪽에 설치된 벽난로에서는 어김없이 고구마가 탐스럽게 익어간다.

박씨가 이 곳에 터를 잡은 것은 4년. 계절을 느끼며 살고 싶어 도심생활을 청산한 그는 일부러 마을과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 집을 지었다. 좋아하는 개를 마음껏 키울 수 있고 음악을 크게 틀어도 상관 없는 호젓한 곳이 필요했기 때문. 덕분에 그의 집에는 인터넷이 되지 않는다. TV는 잘 보지 않기 때문에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수단은 라디오다. 1주일에 한번 볼일을 보기 위해 도심으로 나가는 일 외에 그는 작업실에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의 취향을 반영하듯 작업실에는 음향 장비도 잘 갖춰져 있다. 기자가 방문한 날 비올라로 연주한 바흐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바이올린과 첼로의 중간 음색을 가진 비올라.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는 선율이 지그시 내려 앉은 가을색과 잘 어울렸다.

박씨는 촉망 받는 의대생에서 사진작가로 변신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경북대 의대를 다닐 당시에는 사진작가가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등산을 좋아한 그는 산에 다니면서 재미로 산 사진을 찍었다. 연애 중이었던 아내가 고가의 카메라를 선물할 정도로 사진 찍는 일을 즐겼지만 사진은 취미활동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 신분으로는 장만하기 힘든 좋은 등산장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도둑을 맞았습니다. 등산장비 분실 후 사진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등산 보조활동으로 시작한 사진이 주가 되는 계기였습니다."

본과 3학년 1학기를 마친 뒤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당시 그는 삼덕동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할 정도로 사진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의학과 사진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길을 가기로 결심 했습니다. 집안에서도 제 뜻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당시 결혼한 지 1년쯤 되었는데 아내도 반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사진작가의 길을 걸으면서 그는 독학으로 사진 공부를 했다. 영어로 된 책을 통해 이론을 다진 뒤 현실에 적용해 나가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갔다. "한번은 암실 작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밥 두번 먹었고 화장실 두번 갔다 온 기억밖에 없는데 3일이 지났다고 하더라고요." 속된 표현으로 그는 사진에 미쳐 살았다.

그러면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는 길(의사)을 포기하게 만든 사진의 매력은 무엇일까. 뒤늦게 뛰어든 사진작가의 세계가 결코 만만치 않았을 터, 후회는 없었을까. 박씨는 "사진은 시와 같아서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진 한장에 담지 못할 메시지가 없을 정도입니다. 사진을 찍을수록 사진에 빠져 든 이유입니다. 돌이켜 보면 후회는 남지 않습니다. 의사가 되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 아프리카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아내도 흔쾌히 동의를 한 상황이었고요. 아프리카로 가면 아기는 낳지 말고 현지 아이들을 우리 애처럼 여기며 살자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꽃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발표하고 있다. 접사를 통해 일상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꽃의 아름다움과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사진 작업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화두는 주역이다. "주역은 철학이고 시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사물에서 주역의 원리를 찾아 흑백사진으로 이미지화 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현상은 객관적이지만 현상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제각각입니다. 제 작품에는 저의 주관적 해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저의 작품을 보고 관람객들은 저와 다르게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묘미입니다."

사진은 박씨에게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사진 작가로 명성을 높이는 일에 인생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에게 사진은 구도의 길을 가는데 필요한 수단이다. "인생을 깨달아가는데 필요한 도구가 사진입니다. 사진을 통해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이자 내가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그는 내년 상반기 '부처의 얼굴'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열 계획이다. 각계 각층 인사 50명의 일상 사진과 스튜디오에서 찍은 연출 사진을 나란히 배치시켜 인간의 보편적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춘 전시다. '부처의 얼굴'은 인간의 보편적 이미지를 상징한다. 사진 한장 찍을 때마다 인생의 깊이에 한발 더 다가서고 있는 박씨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안상호 편집위원 shah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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