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만나는 사람들만 만나고 살아간다. 친구도 대부분 같은 부류다. 생긴 것만 다를 뿐, '덩어리'로 따지면 한명이나 다름없다.
늘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나, 같은 분량의 치약으로 양치질을 하고, 같은 분량의 화장지를 쓴 후, 같은 분량의 아침을 먹고, 같은 길을 걸어 출근을 하고, 등교를 한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도 대충 그렇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이다.
충격적인 일도 별로 없고, 나에게 충격을 주는 사람을 만날 일도 잘 없다. 그러다 보니 부류만 다르면 '외계인' 대하듯 거북해진다.
안치환의 '내가 만일'이란 노래는 예전에는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다.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에 물들고 싶어. 붉게 물든 저녁 저 노을처럼 나 그대 뺨에 물들고 싶어.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그대 위해 노래하겠어.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나 행복하게 노래하고 싶어.'
'만일'이라는 말은 만에 하나라도 발생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하늘이 될 일도 만무하고,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가 될 일도 없다. 공허한 가사에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2002년)를 본 후 생각이 바뀌었다.
여기 종두(설경구)라는 한 사내가 있다.
교통사고로 형기를 마치고 막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반소매 차림으로 덜덜 떨면서 차가운 두부를 먹는다. 누가 사다 준 두부도 아니다. 그냥 슈퍼에서 사 먹는다. 가족들은 다 이사를 떠나고, 그에게 베푸는 인정은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꽁꽁 언 두부 같다. 반소매와 언 두부는 매정한 사회에 대한 기가 막힌 메타포이다.
어느 날 교통사고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간다. 비루한 아파트. 낡고 초라한 그 곳에서 공주(문소리)를 만나게 된다. 아파트 거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그녀는 '정상인'이 아니다. 갑자기 욕정을 느끼지만, 여자는 두려움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거부한다. 그는 공주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져보고 싶었을 뿐이다.
어느 날 밤,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 속의 주인공은 뜻밖의 공주다. 공주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하루 종일 좁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며 갇혀 지낸다. 그 햇살은 새가 되어 날아다니고, 자신의 몸에 살포시 내려앉기도 한다. 하루하루 외롭게 지내는 그녀에게 어느 날 어른거리는 그림자처럼 한 남자가 찾아온다. 아무도 만지지 않던 자기 몸을 만지려고 한다. 치한일까.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외로움이다. 달빛에 비치는 나무 그림자도 무섭고, 스산하게 부는 바람도 무섭다. 차라리 그가 있었으면 좋겠다.
'오아시스'는 종두와 공주의 '환대받지 못하는 러브스토리'가 줄거리다. 변변한 직업도 없고, 사고만 치는 종두, 장애 때문에 모두에게 짐이 되는 공주. 둘은 사회에 어울릴 수 없는 존재로 비춰진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정상인인가. 사지가 멀쩡하다고 모두 정상인인가.
종두는 확실히 우리와 같은 분량의 치약만 쓰지 않는다. 그가 본 시선은 편견의 울타리를 넘는다. 박제가 되어가는 공주는 그로 인해 새싹이 돋는다. 안식처를 찾고, 사랑도 나눈다. 버려진 듯한 그녀의 삶은 다시 촉촉해진다.
종두는 어머니 생신 잔치에 공주를 데려간다. 그러나 핀잔만 받고 가족사진도 찍지 못하고 쫓겨난다. 노래방에서 종두는 장현철의 '걸어서 하늘까지'를 부른다.
'어둔 미로 속을 헤매던 과거에는 내가 살아가는 그 이유 몰랐지만. 하루를 살 수 있었던 건 네가 있다는 그것. 너에게 모두 주고 싶어. 너를 위하여. 걸어서 저 하늘까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고함을 지른다. 걸어서 저 하늘까지 갈 태세다.
공주를 업고 지하철역을 뛰어가지만, 전동차마저 떠나고 둘만 남는다. 플랫폼에서 종두에게 업힌 공주가 노래방에서 못 부른 노래를 부른다. '내가 만일'이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공주가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에 물들고 싶어'라고 소망한다.
아무도 없는 지하철역. 공주는 종두의 등에서 내린다. 그리고 그의 주위를 돌며 '붉게 물든 저녁 저 노을처럼 그대 뺨에 물들고 싶어'라고 노래한다. 입이 돌아가 노래를 못하던 그녀가, 종두를 간질이면서 여느 연인처럼 사랑스런 몸짓을 한다.
종두만이 볼 수 있는 판타지일까. 아니면 공주의 내면의 소망일까. 감독은 "사랑이란 세상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나누어 갖고 경험하는 판타지"라고 했다. 누구와도 나눠 가질 수 없는 것이고, 누구나 모두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참으로 남을 사랑하는가 라는 물음에는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오아시스'는 소통에 대한 영화이고, 경계를 허무는 영화이다. 나와 남, 정상인과 장애인,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일상과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관객을 채찍질한다. 경계를 경험하는 일은 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외면하게 되고, 어느 순간 그것이 일상화된다.
'오아시스'는 노래방에 가서 무시로 부르는 노래를 통해 그것을 한번 더 깨우치게 한다. '내가 만일'은 가사도 편하고, 멜로디도 따라 부르기가 쉽다. 그러나 공주에게 '만일'은 절실한 가정이다. 걸어서 하늘까지 갈 한 남자에 대한 간절한 사랑의 화답이다.
이 세상 누구나 다 자기만의 샘이나 우물을 가지고 있다. 누구는 말랐고, 누구는 물이 넘칠 정도고, 누구는 손바닥만하고, 누구는 넓은 논배미만 할 수도 있겠다. 종두는 공주에게 물을 길러 준 풍부한 수량의 오아시스이다.
나눌 수 없는 물이라면 '더러운 물'밖에 더 될까. '오아시스'를 보면서 내 우물의 수질을 가늠해본다. 얼마나 혼탁하고, 얼마나 더러워졌을까. 설마 나눌 수 없을 정도는 아닐까.
김중기 객원기자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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