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어둠'.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먼 자들은 말한다. 마치 우윳빛 하얀 공간 속에 갇힌 느낌이라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영화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는 조금 다른 느낌의 '하얀 어둠'을 말한다. 주인공 유미호(손예진)는 말한다. "내 인생에 태양은 없었어. 그저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이 있었을 뿐"이라고. 주위에 무언가 있었을테지만 가는 한 줄기 빛만을 바라보며 살 수밖에 없는 인생. 무려 14년 동안 그렇게 살아온 두 남녀의 이야기가 '백야행'의 큰 줄기다. 영화적인 완성도도 뛰어나고 배우들의 연기도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2% 부족한 느낌이 남는다. 때론 모든 것이 드러나는 진실은 불편한 법이다. 영화도 모든 것을 낱낱이 드러내기보다는 조금은 관객을 위해 남겨두는 여유가 필요했다. 마치 '하얀 어둠 속을 걷는' 그 느낌처럼.
◆14년의 기다림과 슬픈 살인
영화는 2009년 현재 시점과 14년 전을 오가며 구성된다. 먼저 2009년 현재.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한 남자가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수사팀은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하던 중 14년 전 발생한 폐선박 살인사건과 연관돼 있음을 알아낸다. 그리고 당시 사건을 맡았던 한동수(한석규) 형사를 찾아간다. 14년 전 그 사건. 폐선박내 밀실에서 한 남자가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된다. 피해자는 전당포 주인. 유력한 용의자로 피해자와 내연 관계였던 한 여인이 떠오른다. 하지만 용의자인 그 여인이 자신의 집에서 가스를 피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다. 사건은 용의자의 사망으로 종결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동수는 뭔가 미심쩍은 사실을 발견하고 수사를 계속하려고 한다. 폐선박에서 숨진 전당포 주인의 아들 김요한과 자살한 내연녀의 딸 이지아는 같은 반 친구. 사건의 내막을 아는 듯한 전당포 주인의 부인이자 요한의 엄마인 서해영(차화연)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집요하게 수사를 계속하던 동수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만을 안은 채 결국 진실을 캐내는데 실패하고 만다.
2009년 벌어진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14년 전 요한의 집에서 일을 하던 직원. 동수는 본능적으로 이번 사건과 요한이 관련돼 있음을 직감한다. 사건을 추적하던 형사 한 명이 요한(고수)에게 한 차례 접근한 뒤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동수는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다시 나선다. 한편 자살한 내연녀의 딸이었던 지아는 유미호(손예진)로 이름을 바꾼 채 살고 있다. 그녀는 재벌 총수인 승조(박성웅)와 결혼을 앞둔 사이. 모든 면에서 완벽한 미호가 미심쩍었던 승조는 비서실장 시영(이민정)에게 뒷조사를 지시한다. 시영은 미호가 한번 입양된 사실이 있으며, 이름을 바꾸었고, 주변에 그림자처럼 맴도는 남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요한과 미호의 관계. 피해자의 아들과 용의자의 딸. 과연 그것은 진실이었을까? 충격적인 사실들이 영화 후반부에서 밝혀진다.
◆원작의 한계를 벗어나려 했지만
죽어 마땅한 사람이 죽었지만, 그 죽음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그 아이, 선을 넘었어요. 이젠 멈추게 해야죠!" 동수가 14년간 침묵으로 일관하는 요한의 엄마에게 한 말이다. 몰랐더라면 더 좋았을 진실. 불편한 진실. 하지만 진실을 몰랐기에 밝혀내려 애썼고, 그 진실의 상처가 너무나 컸기에 살인도 마다않고 감추려 했다.
영화의 원작은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이다. 좋은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안전하지만 위험하다. 짜임새 있는 스토리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은 단단한 디딤돌을 딛는 셈이다. 하지만 그 디딤돌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소설과의 비교, 앞서 제작한 드라마와의 비교가 그것이다. 영화 '백야행'은 비교적 이런 어려움을 잘 극복했다고 평가받는다.
그 이유로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가장 컸다. 고수의 눈빛 연기와 분위기는 놀라웠다. 손예진이 연기하는 환한 빛줄기를 돋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너무도 어두워져서 이제 스스로는 헤어날 수 없을 것 같다. 미호가 약속했던 미래. 과연 그 미래가 찾아올 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이미 미호를 지켜내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요한. 14년간 폐선박의 밀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요한의 깊은 상처를 고수는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손예진은 치명적인 매력을 여지없이 발산한다. 한없이 연약해 보이지만 사실 14년을 이어오는 죽음의 고리를 만든 인물은 사실 미호였다. 결혼을 앞둔 승조가 물었다. "나의 어디가 좋으냐?"고. 미호는 답했다. "돈이 많아서."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냐는 물음에 미호는 다시 말했다.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가난했기 때문에 온 영혼이 갈갈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미호는 세상을 홀로 서서, 아니 요한과 함께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돈이라고 믿는다.
14년 전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아들을 잃는 아픔과 그로 인한 집착을 보였던 형사 한동수 역의 한석규. 연기는 뛰어났지만 막바지에 모든 것을 보여주고 해결하려는 듯한 모습은 관객의 공감대를 얻기 어려웠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들이 다 모여서 한판 소동을 벌이고, 추격과 격투 장면까지 넣었어야 했는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마지막에 김요한에게 던진 사죄의 대사와 유미호에게 원망스레 던진 대사는 관객의 여운마저 잠재워 버렸다. 한석규와 손예진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했을 장면이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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