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종가와 종가 사람들

초겨울 산골 마을은 고즈넉하다. 돌담이 정겹다. 처마가 웅혼한 기와집이 여러 채 남은 것으로 보아 한때 명문세도가의 위세를 떨친 마을이었던 것 같다. 고택은 세월에 무심한 듯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사랑채가 손님을 반긴다. 돌계단을 대여섯 단 올라 누마루에 올라서니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눈맛이 시원하다. 합천의 묵와고가다. 선조 때 선전관을 지낸 윤사정 공이 지은 집으로, 독립운동가 윤종수의 고택이다. 지형에 맞추어 지은 집은 호방하고 장쾌하다. 사랑채 마당의 연륜 깊은 회나무도 이 집과 함께 세월을 건너왔으리. 싱그러웠던 목재의 육질은 세월에 바래지고 섬유질의 뼈대만 남았으나, 지붕을 떠받치는 그 모습이 여전히 옹차다.

고택은 말끔하게 수리된 듯하다. 집을 지키는 부부의 정성으로 온기가 흐른다. 반들반들한 마루가 안주인의 부지런한 손길을 느끼게 해준다. 종가의 운명은 봉건체제의 몰락과 함께 기울어 갔다. 종손마저 대처로 떠난 종가가 허다하건만, 이 집은 다행스럽게 후손의 보살핌을 받으며 건재하다. 종가 사람들이 우직스럽게 지켜온 무형의 정신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자신의 존재보다 오로지 제사와 접빈으로 일생을 살아온 종가 사람들. 종가가 명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종부란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온 여인들의 노동과 희생의 덕택이 아닐까.

안채 대청마루에 앉았다. 안주인이 직접 만든 국화차를 내놓았다. 윗대 종손이 세상을 떠난 후 기울기 시작한 종가를 지키기 위해 귀향한 차손이 관청을 찾아 다니며 3년 여에 걸쳐 복원 수리를 했다. 안주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강단있는 성품이 엿보인다. 명문 여학교 출신으로, 종가 며느리로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안채의 후원에는 정성스레 갈무리한 산국차가 대소쿠리에 담겨 엷은 햇살에 마르고 있다. 그 차를 말려 '묵와고가' 상표를 붙여 방문객에게 선물할 예정이란다. 500년이 넘었다는 후원의 모과나무도 이 집의 역사를 증언하듯 당당하게 서 있다.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는 시대다. 종가가 지켜온 정신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설사 명분에 묻혀 실리를 놓치더라도, 종가의 정신은 인간다움의 임계점이 아닐까. 진정 종가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관념을 뛰어넘는 실천적 윤리였음을 기억하자. 세월을 거슬러가며 종가를 지키는 종부의 모습은 자못 숭엄하기까지 하다. 자긍심과 사명감으로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종부에게는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있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면 누군가가 그 맥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묵와종가의 안주인은 대문 밖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종가의 기와 지붕에도 산 그림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경희 달서여성인력개발센터 강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