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마을 운동
1960년대 우리나라는 대도시 중심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지역이 농촌이었다. 1970년대 초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행정 구역상 대구시에 속한 지역도 풍경이나 생활 방식에서 저 먼 시골과 다를 바 없었다. 하수도가 없어 개숫물은 땅위로 구불구불 흘렀고, 도로는 아예 없거나 군데군데 끊어져 있었다. 수돗물이 공급되는 집은 극히 드물었고, 강가에는 다리가 아니라 늙은 사공이 손님을 기다렸다. 그랬던 한국을 상전벽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바꾼 것이 새마을 운동이었다.
김태환 전 대구시청 도시계획 과장은 1971년 10월부터 1974년 8월까지 대구시 동구청 건설과와 총무과 새마을계에 근무했다. 지산동과 신천동이 그가 맡은 구역이었다. 당시에는 수성구가 없었고, 지산동 역시 동구 관내였다.
그 시절에는 마을마다 새로 길을 내고, 다리를 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태환 과장은 당시 1년에 70여건씩 설계를 했다. 그만큼 변화가 많던 시절이었다. 큰 공사는 아니었고 마을 단위의 자잘한 공사가 대부분이었다. 자고 나면 없던 다리와 도로가 생겨났고, 어제까지 우물이나 강가로 물 뜨러 가던 사람들이 집안에서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을 받았다. 구불구불 흐르던 구정물이 사라졌고, 개숫물은 땅 속에 매립된 하수도관을 통해 눈에 띄지 않고 흘러갔다.
대구시내 변두리 지역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김태환 전 과장에 따르면 당시 토목직 공무원들은 밤잠을 잊은 채 설계, 시공했다. 요즘처럼 하청이나 입찰을 주기도 했지만 공무원들이 직영사업도 많이 했다. 공무원이 직접 자재를 사들이고, 인부를 고용하고, 공사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임금 계산까지 해야 했다. 공무원 수는 적고 일거리는 산더미 같은 시절이었다.
"1972년 남부 정류장에서 담티 고개까지 도로확장 공사를 직영으로 했는데, 기존 도로 폭 6m를 20m로 확장하는 긴급 공사였습니다.(지금은 50m임) 매일 밤 10시가 넘어야 겨우 퇴근할 수 있었습니다. 더위를 먹고 쓰러지기도 했는데, 참집 주인이 삶은 수박을 우물에 담갔다가 먹으면 더위를 이길 수 있다고 해서 먹었습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뒤로는 더위로 쓰러지는 일은 없었어요."
당시 작업은 주먹구구인 면도 있었다. 비탈면에 잔디를 심어야 하는 데 길러놓은 잔디가 없었다. 인부들이 인근 야산의 야생 잔디를 떠서 GMC 트럭(군용트럭)으로 실어와 심기도 했다. 그 시절부터 건설사업, 조경사업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김태환씨는 "당시에는 가정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오직 땀과 눈물, 고된 작업만 이어지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고된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신바람 나던 시절이었다. 도시가 성장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던 날들이었다.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듯 대구시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던 시절이었다. 공무원들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한번 해보자,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일을 조금 더하고 덜 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고 자기 땅의 일부가 도로에 편입되는 것을 흔쾌히 허락해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갔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도로편입 보상금을 내 놓으라며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제대로 된 문서가 없어 곳곳에서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 불량자재'빨리빨리의 배경
새마을 운동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벽돌이나 인도 블록 같은 자재가 많이 필요했다. 수요에 비해 공급할 수 있는 공장은 턱없이 부족했다. 공사 시행자측이 '빨리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러대자 생산업체는 미처 양생되지 않은 자재를 공급하기도 했다. 그래서 공사 후에 하자가 많이 발생했다. 공기에 맞추다 보니 부실공사가 발생했던 것이다.
"흔한 말로 날림공사라고 비판하기 쉽지만 당시로서는 피치 못할 면도 있었습니다. 물론 더 잘했으면 좋았겠지요. 그러나 그 시절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바빴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의지로 똘똘 뭉쳐 있었어요. 밤잠 자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 자재 수급이 안 된다고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었지요. '빨리빨리'는 한국 건설분야의 병폐로 이름을 떨쳤지만 당시에는 그만큼 의욕이 넘쳤습니다."
당시 새마을 공사에는 예비군과 주민이 동원돼 다리를 놓고 길을 닦기도 했다. 요즘 그렇게 사람을 동원하면 온갖 비판과 반발이 쏟아지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방식의 공사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예산은 부족했고 고치고 다듬어야 할 곳은 많던 시절이었다. 1972년 시작한 신천 하상 물줄기 바로잡기 사업에도 예비군들이 동원됐다.
"아마 대구가 전국 최초로 하천 정비사업을 시작했을 겁니다. 오늘날과 같은 신천 경관을 이루는 시초였지요. 당시에는 서울의 한강도 자연 상태 그대로 물이 흘렀어요. 강을 따라 공원이 조성되고 자동차 길이 만들어진 것은 1980년대에 들어온 다음이었어요. 신천 하상물줄기 바로잡기 공사 역시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작업에 예비군들도 동원됐습니다."
신천하상 물줄기 바로잡기 사업에는 자동차가 많이 투입됐다. 상부에서는 공사를 재촉하고 자동차가 부족해 진척이 늦었다.
"주변에 트럭 가진 사람 있으면 누구라도 차를 빌려야 했어요. 그래서 과장은 과장대로 아는 사람에게 차를 빌리고, 계장은 계장대로 자동차를 빌려 달라고 지인에게 부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책정된 임차료가 부족했고 그게 말썽이 돼 사람이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트럭이 부족해서 여러 사람이 여기저기서 빌렸는데 그게 비리처럼 비쳐진 것입니다. 잘 하려고 애쓰다가 억울하게 욕을 먹고 곤욕을 치른 셈이지요."
김태환 전 과장은 보통 시민들 눈에 비리처럼 보이는 분야, 불량자재, 빨리빨리 등이 대부분 '잘 해보자'는 의욕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 멀쩡한 보도블록 왜 바꾸나
거리를 걷다보면 멀쩡한 보도블록을 바꾸거나 연석 교체작업 광경을 본다. '지방자치 단체가 돈을 못 써서 난리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김태환 전 대구시청 도시계획 과장은 "미관이 곧 도시의 경쟁력이다. 멀쩡해 보이는 것도 더 보기 좋은 것으로 교체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도시미관이 좋아야 경제력도 높아진다. 또 그런 공사 자재는 대개 국산인데다가 고용 효과도 유발할 수 있어 결코 예산 낭비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멀쩡해 보이는 보도블록을 뜯어내면 버리지 않고, 거기보다는 좀 못한 장소의 미관 개선을 위해 재활용합니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자꾸자꾸 고치는 게 귀찮게 느껴지겠지만 자꾸자꾸 고쳐야 늘 깨끗한 상태, 더 깨끗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도시가 깨끗하면 시민들 기분도 좋아지고요. 외국인 사업가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보여줄 수 있어 국가 경쟁력도 높일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즘 기업하기 좋은 도시, 살기 좋은 도시라고 홍보를 앞 다투어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우리나라 화장실이나 지하철, 거리가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을 만큼 깨끗한 편에 든다고 강조했다.(물론 일본보다는 덜 깨끗하다) 유럽의 이름난 도시들도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더럽다는 것이다.
시민들 눈에 지방자치단체는 걸핏하면 땅을 파헤치고 묻고 또 파헤치는 것처럼 보인다. 어째서 한번 땅을 팔 때 여러 공사를 한꺼번에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김태환 전 대구시청 도시계획 과장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설명을 덧붙였다.
"지하 매설물에는 통신선로, 전기선로(가로등), 수도관, 도시가스 등이 있는데 각 시설물마다 시행 부서가 다릅니다. 각 시행부서가 따로 파헤치는 걸 예방하기 위해 분기별로 1년에 4번 정도 유관기관 협의회를 열고 동시에 사업을 시행합니다. 그럼에도 부서마다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합니다. 예산 부족으로 작업 진행이 순조롭지 못하거나, 민원이나 피치 못할 새로운 사안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조두진기자
댓글 많은 뉴스
한덕수 탄핵소추안 항의하는 與, 미소짓는 이재명…"역사적 한 장면"
불공정 자백 선관위, 부정선거 의혹 자폭? [석민의News픽]
헌정사 초유의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제2의 IMF 우려"
계엄 당일 "이재명, 우원식, 한동훈 복면 씌워 벙커로"
무릎 꿇은 이재명, 유가족 만나 "할 수 있는 최선 다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