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

한달 전 조카결혼식 위해 日방문…전통혼례 치르는 교민 보고 감동

필자는 한 달 전쯤 5촌 조카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였다. 필자의 큰아버지께서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징용 대상자로 끌려가셨다가 해방 이후에 일본 현지에 정착한 뒤 그곳에서 한국인인 큰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이룬 분이셨다. 재일교포 2세인 필자의 사촌 형님도 일본에서 재일교포 2세인 형수님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필자의 5촌 조카 또한 일본에서 재일교포 3세인 신랑을 만나 이번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지금이야 가고 싶을 때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보고 싶을 때 최소한 전화라도 한 통 할 수 있는 곳이 일본이라지만 해방 이후 십수 년간 단절되어 있었던 양국 간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한일수교 정상화 이후에도 냉전의 시대 흐름 때문에 일반인들의 왕래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던 수십 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네 가족들은 어느 순간 또 다른 차원의 이산가족이 되어 있었다.

역사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오셨던 큰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흘러간 세월에 묻혀 그곳에서 영면(永眠)에 드셨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큰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이 전부인 사촌형에게도,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그러한 사촌형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이 전부인 조카들에게도 큰아버지의 뜨거운 수구초심(首丘初心)만큼은 끊이지 않고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기에, 큰아버지께서 작고하신 이후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친척들의 교류는 오히려 시나브로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번에 결혼식을 올린 신부는 촌수(寸數)로는 분명 필자의 5촌 조카이지만 나이는 필자와 2, 3세 차이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여동생이나 다름이 없었다. 핏줄은 같지만 분명한 것은 30년 이상의 세월 동안 필자는 한국에서, 조카는 일본에서 살아왔다는 것, 그리고 기본적인 인사말을 제외하고는 필자는 일본어를, 조카는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 조카가 시집을 가는 결혼식장에 이르렀다. 꽤 큼직한 식장의 한쪽에는 가야금, 거문고 등 여러 국악기를 갖춘 국악관현악 단원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서, 하객들의 흥을 돋우고 있었고, 그런 가운데 신랑, 신부의 입장을 알리는 사회자의 소개말이 한국어-일본어 순서로 스피커를 울렸다. 태평소 연주자가 두 사람의 앞날을 보여주듯 경쾌한 선율을 뽐내기 시작하자, 로비에서 식장 안으로 향하는 중앙 출입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신랑, 신부가 화사한 조명을 받으며 식장 안으로 등장했는데, 신랑은 사모관대를 하고 있었고 한복을 입은 신부의 머리 위에는 조심스럽게 족두리가 얹혀 있었으며 신부의 볼에는 연지곤지가 수줍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재일교포 3세인 신랑, 신부가 어설픈 한국어 발음으로 직접 낭독한 '혼인서약서'에는 '저희는 자랑스런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 등 잠시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결혼식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축하공연을 자처한 사물놀이패가 식장 한가운데 등장해서는 상모를 돌리면서 한바탕 신나게 놀이를 하는데, 재일교포 2, 3세로 보이는 양가 집안 하객들이 마치 사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식장 한가운데 모여서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더니 이내 손에 손을 맞잡고 강강술래를 돌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짓궂게 보이는 신랑 친구들이 갑자기 무동을 태워 신랑을 들어올리니까, 한쪽 옆에 있던 다른 친구들이 똑같은 말을 만들어 기마전 싸움을 해보이는 재미있는 장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객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아니었다면, 연방 '아~' 하고 내뱉는 필자의 탄성이 꽤나 크게 들렸을 것 같다.

그렇게 덩실덩실 흥겹게 춤을 추고 있는 교포들이었지만, 그들이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그 자체를 원망했던 적이 한두 번이었겠는가. 이제는 된장국보다 미소국이 더 익숙해져 버린 그들일지도 모르지만,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 모습을 간직한 그들의 태도와 마음가짐 앞에서 필자는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존경심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오늘 저녁, 장롱 속에 틀어박혀 있는 한복이나 다시 한번 곱게 곱게 챙겨 보아야겠다.

하경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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