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부](15)상주 화서 노수신 종가 이진숙 여사

"조상들 해오던 대로 정성껏 제사 모시지요"

상주의 가을 하늘은 유난히 높고 푸르다. 깎은 감들이 유행하는 인테리어 소품인 비즈발처럼 뱅글뱅글 돌아간다. 푸르름과 주황색이 어우러진 가을의 끝자락 곶감도시 상주의 명성에 걸맞은 가을풍경이다. '조선의 두보'라 일컫는 상주 화서면 사산리 소재 노수신 선생의 종가를 찾았다.

소재 노수신(1515~1590)은 광주 노씨로 1514년 식년 문과 초시를 비롯해 회시'전시에 모두 장원급제(삼장연괴'三場連魁) 했다. 1543년(29세)에 성균관 전적에 취임한 이래 19년간 진도에 유배된 후 1585년에는 영의정에 오른 명신이다. 특히 선생은 도학에 뛰어났고 문장가로서는 조선의 두보라 할 만큼 시에 능한 분이다.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한 옥연사 앞으로 단아한 한옥1채가 앉아있다. 소재 노수신 선생 종가 13대 종부 이진숙(45) 여사의 보금자리다.

옥연사 앞에 차를 세우고 집안으로 들어서려니 옷매무새부터 단정히 해야 할 듯한 느낌이 들었다. 풀어진 단추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채우고 종가 안으로 들어갔다. 반갑게 맞이하는 종손과 종부 앞에서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갔다. 벗어놓은 신발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한 번 더 뒤돌아보게 된다.

##현대 아닌 조선시대에 시집온 것 같아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종부는 스물여섯에 종손과 맞선을 보게 되었다. 일년간 교제한 후 스물일곱에 소재 집안의 13대 종부가 된 것이다. 맞선을 볼 때 제사가 많은 집안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다고 한다. 처음 만났을 때 김천 직지사에 갔었는데 약수터 바위에 다다르자 손수건 한 장을 펼친 모습이 종부의 마음에 와닿은 것. 대구에서 다시 종손을 만났는데 이번에는 해물찌개를 가득 담아 종부 앞에 내밀었는데 종손의 자상함과 배려심이 종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종손의 자상함과 따뜻함에 매료돼 제사가 많은 줄 알면서도 혼인을 선택하게 된 종부는 신행오고 처음 이 곳 종택으로 들어오게 됐다. 시골길이 꼬불꼬불하기도 하고 사당도 있는 모습에서 현재가 아닌 조선시대로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김천이 친정인 종부를 상주의 시댁으로 친정어머니와 큰오빠가 데려다 주었다. 데려다 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상을 잘 모시고 제사를 잘 지내면 너그들한테 다 좋다"였다. 친정어머니와 오빠가 다녀간 길을 쳐다보면서 얼마나 눈물지었는지 모른다는 종부의 눈가가 촉촉해 보인다.

##여름에도 긴치마 입고 있는 게 마음 아파

종손이 양자이기 때문에 종부는 시집오는 날로 큰어머님과 함께 지냈다. 어른 모시고 살면 좋은 점이 더 많다는 종부의 나지막한 음성에서 종부다움이 느껴졌다.

스물 일곱에 대종가의 종부가 되어 늘 긴치마를 입었다고 한다. 사계절 모두 긴치마를 입고 지냈는데 종부 본인은 불편한지 느끼지 못하는 나날들이었다.

발목만 보여도 짧다고 느껴지는 그런 종부였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긴치마를 입고 김천 친정에 갔다. 제사 몇 번 더 지내면 되는 거라며 토닥여주셨던 친정어머니가 그날은 "니가 여름에도 긴 치마 입고 있는 거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하셨다. 돌아오는 내내 검게 그을렸을 친정 어머니 마음속 생각에 애끊는 느낌이었다.

##밥 한 그릇이라도 정성스럽게 올렸는데…

"어떤 제사 음식 할 때가 힘드냐?"는 질문에 종부는 망설임없이 묘사라고 대답했다. 제관이 100여명 정도가 된다고 하니 말만 들어도 종부의 어깨가 어떨지는 짐작간다. 제관들은 전국에서 관광버스편으로 이 곳 상주의 화서에 모인다. 음식의 가지수도 더 많고 양도 많아야 하는 묘사가 다가오면 걱정도 되고 묘사가 끝났더라도 치우는데는 일주일이 걸린다. 그러고 나면 한 일주일 정도는 몸이 피로하다.

"제사음식 마련하면서 제일 섭섭할 때가 언제였냐?"는 질문에 종부는 수줍은 듯 이야기를 살며시 꺼낸다. 밥 한그릇이라도 좋게 떠 놓는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했는데 여러 제관들 있는 곳에서 떡이 미흡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두미를 잘 못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마음이 무척 섭섭했다며 나지막히 이야기한다. 그래도 집안 어른들이 '애쓴다''애먹는다' 이야기를 할 때면 다 잊고 힘이 난다는 종부다.

##아이들, 병풍 치고 제사 놀이

큰어머님은 집안내력이나 범절, 양반다움을 강조하셨던 분이다. 아이들한테 "양반은 그라마 안된다"며 다른 아이들과 차별되는 점잖음을 이야기 하시곤 했다. 종부는 평상시에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아이들 행동에서 어른 밑에서 자란 아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고 한다. 큰아이가 다섯 살, 작은아이가 네 살 되던 해, 남매가 방에서 놀고 있었다고 한다. 무얼 하나 싶어 보았더니 까만 비디오 테이프를 병풍처럼 나란히 세워 놓더니 남매가 절을 하면서 마지막에 큰아이가 "감소고우"하는 것이었다. 그 때 종부는 이것이 바로 산 교육이다. 종손의 영향을 받는가보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재 고등학생인 아들의 어깨가 무거울까봐 종손의 임무를 많이 거론하지 않는다. 내가 지낼 수 있을 때가지 조상님들 제사를 받들다가 할 수 없을 때가 되었을 때 그 때 아들에게 물려주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있다. 딸을 종부의 위치로 시집 보내시겠냐는 질문에 웃으면서 대답한다. "제사 지내는 것은 괜찮지만, 주관하는 데는 좀…." 손을 내젓는다.

종부로 시집오면 탕국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 있다. 많은 제사 횟수를 요즘의 신세대가 하는 것처럼 줄이는 것을 종부는 어떻게 생각할까. 질문을 해보았다. 제사 음식 장만하는 것은 좀 힘들지만 조상을 잘 모시고 우리 전통을 이어간다는 생각에 조상들이 해오던 대로 힘닿는 데까지 정성껏 모시고 싶다는 게 종부의 바람이다. 카메라 울렁증이 있다며 수줍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종부의 모습에서 우리 머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여성상이 엿보인다. 일년 열두달에 손가락 열개라도 모자라는 제사를 모시면서도 그저 정성으로 지낸다며 웃는 종부의 모습과 가을 하늘이 많이 닮았다. 직접 장만한 곶감을 비닐팩에 담아 건넨다. 돌아오는 차에서 꺼내 본 곶감조차 종부처럼 다소곳하다.

상주박물관 김유희 학예연구사 folklore96@korea.kr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바로잡습니다=11월19일자 주간매일 종부 14회 평산 신씨 판사공파종택 이성숙 여사 기사 본문 가운데 '진성 이씨 집안에서 시집와'라는 내용은 '영양 석보 재령 이씨 집안에서 시집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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