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2009년이 저문다. 올해도 한 달을 남겨놓았다. 거리에 뒹구는 낙엽을 치우는 사이 겨울은 가을을 당당하게 밀쳐내었다. '새천년'의 첫 10년이 막을 내리고 있다. 세월은 머물지 않는 법. 잘 알면서도 그 뒷자락을 잡고 아쉬움에 젖는다. 10년 전의 '밀레니엄 버그'라는 말을 기억하는가. 지긋지긋한 아이엠에프 한파 속에서 희망의 탈출구로 여겼던 새천년의 출발. 그때 우리는 모두 들뜬 마음으로 새해 아침을 맞이했다. 찬란하게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희망을 안고서 말이다. 그리고 꼭 10년. 그 시간은 후딱 지나가고 말았다. 졸지에 도둑맞은 느낌이다. 그간 작은 소망이라도 이루었는가? 그때 그 희망은 무엇이 되었는가?
지난 10년은 디지털시대를 분명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은 디지털문화 한복판에 우뚝 세워진 상징물이 아닌가 싶다. 이것을 사용치 못하게 하면 대란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의 일상은 이것과 함께 시작한다. 사이버공간은 현실과 대립하는 '가상'이 아니라, '가상현실'이다. 초고속 정보망은 미세한 호흡까지도 실어 나르고 고성능의 디지털기기는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는다. 왜 그토록 휴대전화와 인터넷에 매달리는가. 현대인의 개인주의는 단절의 벽을 더욱 두텁게 만든다. 그럴수록 개인은 불안해진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휴대전화를 손에 놓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대상과 통화하느라고 눈앞의 사람을 못 보는 어리석음과 부도덕이여! 마음의 소통을 이루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들 속에 바로 내가 있다.
복잡함과 빠른 속도가 디지털 문화의 속성이다. 이 때문에 노인층은 디지털 문화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크다. 8090의 N세대와 기성세대의 문화적 격차를 두고 '지구인과 외계인'으로 비유할 정도다. 기성세대가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에게 자신의 의자를 물려주는 것은 당연하다. 나잇값 못하고 의자만 지키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사회는 정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물려주는 것과 쫓겨나는 것은 다르다. 고령화사회에 대한 담론이 실용성이란 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마을에 노인 몇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박물관이 하나 있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삶의 경륜에서 나오는 그들의 지혜와 품격이 이 사회의 건강을 유지하는 토대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가 노인층을 변두리의 어둡고 눅눅한 공간으로 밀어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몇 개월 전 비정규직법이 결국 아무런, 어떤 대안도 마련하지 못한 채 시행되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졌던 정치인들의 말, 말, 말. 모두 헛소리였던가. 비정규직 종사자와 가족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봤는가. 그 몰인정함이여! 노동의 정당한 대가는 존재의 근거고 자존의 첫걸음이다. 지난 10년의 우리 사회는 아르바이트 정책, '88만원 세대', 희망근로, 청년 실업, 20대의 우울증과 같은 가슴 아픈 말들을 만들고 말았다. '억대 미성년 주식 부자 210명'이라는 신문 활자가 괴물같이 느껴진다. 보험금을 노리고 어머니와 누이를 청부 살해한 17세 패륜아의 말, "강남에 살고 싶었다". 하늘을 찌르는 높고 우람한 빌딩 숲이 만드는 그늘이 너무 짙다. 평등한 사회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루저'와 '스펙'이란 말이 온통 우리 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그런데 실은 '갑자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물질과 몸'이란 욕망에 깊이 빠져 있다. 이것이 하나의 사건으로 표면화되었을 뿐이다. 문제투성이니 질주하는 자본주의에서 뛰어내리자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격은 유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요사이 왜 많은 사람이 막걸리를 찾는가. 맛있고 몸에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 막걸리를 마시는 판의 분위기와 정취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결국 휴머니즘이다. 모두 인간적인 것에 목말라 있다. 새천년의 두 번째 10년은 곧 다가올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또 새 희망을 품을 수밖에. 그 희망 속에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심어보자.
신재기 문학평론가·경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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