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첫사랑으로 기억되는 것은 영광스럽다. 나이든 남자의 첫 연애 상대가 되는 것은 부담스럽다. 누군가에게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기에는 이젠 너무 나이가 들어버린 나는 조동진의 노래 '제비꽃'을 흥얼거리며, 잠시 무미(無味)했던 내 소녀 시절을 애도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단 한번도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던 적이 없다. 나는 누군가의 두 번째 사랑이거나, 네 번째 사랑이거나, 심지어 끝에서 두 번째 사랑이기도 했다. 다시 고백하자면, 나는 첫사랑을 가져본 적이 없다. 첫사랑과 첫 연애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가 풋풋한 어린 날의 아련한 기억이라면, 후자는 말 그대로 단지 '첫 연애'일 뿐이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을 때 첫 연애를 해보았을 뿐, 첫사랑이란 걸 지녀본 적이 없는 나는 첫사랑의 애틋함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앞에 둔 것처럼 어리둥절해진다. 때로는 남들이 다 합격한 시험에 나 혼자만 낙방한 것만 같은 열등감이 솟구치기도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100여년 전 영국 소설가 조지 기싱의 '기싱의 고백'(헨리 라이크로포트의 수상록)을 생각했다. 만약 조지 기싱이 여자였더라면, 그렇게 가난하게 살고 죽지 않았더라면, 말년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쓰는 대신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마주쳤던 느낌을 썼더라면 저렇게 쓰지 않았을까.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에 감사하고, 얼마나 많은 일을 아쉬워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그리워해야 할까. 지은이 곽아람은 읽었던 책과 보았던 그림을 통해 자신을 이야기한다. 우리도 틀림없이 맞이했겠지만, 자극(책이나 그림)이 없었던 탓에 흘려보냈을 감정들에 대해 말이다.
이제 막 서른살을 넘어선 지은이의 저 '첫사랑'에 대한 고백은, 지나가버린 우리의 날들이 얼마나 아련하고 아쉬운가를 알려 준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이 '첫사랑'뿐일까. 언제까지나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 어디 '첫사랑' 뿐일까.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순전히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기자 역시 그렇다. 철이 든 뒤로, 모든 기다림의 순간 책을 읽는다. 그 시간이 아까워서이기도 하고, 약속 시각보다 늦게 도착하는 사람을 지루해하지 않고 기다리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책에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궁금해서이기도 하고, 귓가에서 쟁쟁거리는 주변의 소음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책을 읽지 않고 보낸 10대의 날들에 대한 원망과 열등감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자신이 접했던 책과 그림을 매개로 저 '첫사랑'처럼 애틋하고 깨끗하게 기억해야 할 것들에 관해, 아쉬움과 씁쓸함, 설렘에 대해, 이제는 오지 않을 날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림을 전문 지식으로 읽어주는' 책은 흔해서 발에 채일 정도다. 책과 작가를 재미있게 풀어주는 책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림을 통해 책을, 책을 통해 그림을 연결'하는 책은 드물다. 지은이는 '그림과 책, 그리고 그녀 자신'을 묶어서 이야기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문학과 그림, 이제 막 서른을 넘긴 한 여자를 읽을 수 있다.
책은 박완서의 '나목'과 박수근, 카프카의 '변신'과 마그리트, 반 고흐와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황순원의 '소나기'와 존 싱어 사전트의 '바이올렛 사전트',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제임스 티소의 '과부' 등 각각 30개의 그림과 책, 지은이의 삶을 담고 있다. 367쪽, 1만4천5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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