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문화재단이 할 일

외환위기 직전이니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문화부 기자였던 당시, 기사 문제로 청구문화재단 관계자의 항의 방문을 받았다. 재단의 모기업인 청구는 대구에서는 물론,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건설회사였다. 또 방송국 사주의 기업이기도 했다. 재단 사무국장이라고 밝힌 그 관계자의 항의는 문화재단 비판에 관한 것이었다. 기자는 '문화'라는 이름을 붙여 나눠 먹기 하는 상을 만들거나, 친분 있는 단체에 몇 푼 지원하며 생색내는 곳이 무슨 문화재단이냐고 답했다.

그러자 그 관계자는 어떤 일을 하면 좋겠느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2, 3년 만에 뚝딱 아파트를 지어 곧바로 이익을 챙기는 기업은 문화사업과 생리가 맞지 않다고 했다. 문화사업은 10년, 20년 뒤를 보고 하는 사업이며 아예 이익을 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꼭 한 번 해볼 테니 제안을 해달라는 정중한 부탁에 대구 경북에 있는 청구 아파트 단지에서 주민음악회를 해보라고 했다. '슬리퍼 음악회'라고 이름도 지어주었다. 동네 주민들이 슬리퍼를 신고 관람을 할 수 있는 음악회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그럴듯한 사기성 상상력까지 덧붙였다.

공연 마니아가 된 인사에게 '왜 그렇게 공연장을 자주 찾느냐?'고 물었을 때,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음악소리가 들려 가보니 아파트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때 처음 현장 공연에 감동을 받아 마니아가 됐다. 당시 청구가 지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는 답을 했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즐겁고 보람된 일이겠는가? 그 사람은 평생 '청구'라는 기업을 잊지 못할 것이며, 그 기업 홍보 가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 달 뒤, 청구문화재단은 달서구 월성동 청구아파트 단지 광장에서 음악회를 열었다. 일대 좁은 도로가 난리 날 정도로 성황이었다. 이어 경기도 일산의 블루힐 단지에서도 음악회를 열었다고 했다. 너무 반응이 좋았다는 감사 전화와 함께 계속 아파트 단지에서 음악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해 말 외환위기가 터져 청구는 도산했다. 슬리퍼 음악회는 자연히 없어졌다. 당시 1회 공연의 비용은 200만~300만 원 정도라고 들었다.

요즘, 문화재단 설립 소식이 심심찮게 들린다. 대구문화재단이 출범했고, 수성구청이 문화재단을 설립한다고 한다. 중구청은 지난해 8월 도심재생문화재단을 설립해 도시대학을 운영하고, 근대문화체험관과 쌈지공원 조성을 위한 부지 매입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몇몇 기업에서 운영하는 문화재단도 있긴 하지만 나눠 갖기 식의 상을 주거나 장학금 전달 등이 주 업무여서 '문화'라는 이름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재단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들의 일은 거창한 기획전이나 도서관 운영, 체험관 짓기 등 굵직굵직한 것들이다. 인프라 구축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바란다면 이와 함께 소규모 전담팀을 꾸려 가벼운 길거리 음악회를 활성화하면 좋겠다. 몇 년 전 중구청은 외부 전문가로 문화기획단을 구성했다. 이들은 무보수로 1년 동안 각 동(洞)을 돌아가며 음악회를 개최했다. 1년 사업비는 2천400만 원으로 회당 200만 원꼴이었다. 국악과 양악, 무용 공연과 때로는 주민 시낭송 같은 프로그램도 있었다. 구청장이 이 음악회에서 노래를 한 곡 부르기 위해 매달 음악회를 기다린다는 우스개가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다소 정치적이긴 하지만 주민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이러한 무대는 문화재단이 아니라 각 구'군청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만들 수 있다. 더욱이 요즘은 지하철 역 같은 곳에서 자발적으로 음악회를 갖는 개인이나 단체도 많다. 이들을 활용하면 길거리 곳곳에서 주 단위, 월 단위로 공연이 벌어지는 도시를 만들기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대형 공연이나 유명 전시회 유치도 중요하지만 풀뿌리 문화운동이 벌어지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문화재단이라는 이름을 걸어놓고 어떻게 하면 생색을 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인드를 갖고서는 결코 실행할 수 없는 꿈 같은 일이기는 하다.

鄭知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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