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초입의 바람이 제법 차다. 하지만 여전히 내리쬐는 퇴약볕은 따갑다.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예천 권씨 초간종택을 지켜오고 있는 종부 이재명(70) 여사를 찾아 나서는 발걸음에는 설렘과 무거움이 교차된다.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진성 이씨 문중의 대종가인 주촌(경류정)종택에서 100리길 멀다 않고 시집온 이래로 지금껏 종가 지킴이로, 예천 권씨 초간 선생 가문의 버팀목으로 꼿꼿하게 살아오고 있는 종부의 삶이 이방인을 과거로의 시간여행으로 이끌고 있었다.
◆45년간 종부 삶…바깥 잠은 한차례도 없어
종부의 첫 인상은 여느 양반네 규수 못지않게 단아했다. 칠순의 나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곱게 차려입은 옥색과 쪽빛 치마 저고리가 아름다운 한국의 여인네였다.
종부에게서, 태어나 25년간 말 벗이 됐고, 놀이터가 됐고, 여름철이면 그늘을 만들어 편안한 휴식처가 됐던 친정 주촌종택 마당에 550여년 뿌리내린 뚝향나무(천연기념물 314호)의 향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어서 오세요. 예전에도 한번 언론사에서 취재해 갔었는데…" 조용한 말씨에도 종가 여인네의 품격이 묻어있다. 스물다섯 나이에 어른들의 혼약으로 맺어진 초간종택 종부로서의 삶을 살아 온 45년 동안 바깥세상과의 일정한 간극으로 살아왔으니 별 다른 사연이 있을 게 없다는 말이다.
"시집와서 지금껏 친정 집 이외에는 바깥 잠을 자본적이 없어요. 그 흔한 여행 한번 다녀온 적이 없으니 '현대를 살면서도 과거 여인네처럼 살고 있다'는 말을 듣는지도 몰라요."
45년 긴 세월을 어찌 바깥 잠을 잘 기회가 없었을까? 하지만 종부에게 그럴 만한 이유는 종가 여인네의 삶보다 다른 이유가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계속된 집안 식구들의 병 구환이 종부에게 또 다른 고통의 삶을 가져다줬는지도 모르겠다.
◆시조부'시어머니'셋째아들로 이어진 40년 병 구환
종부에게는 여느 종가집 여인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봉제사'접빈객'은 그저 소일거리나 다름없었다. 물론 불천위 3위를 포함해 매년 12차례의 봉제사를 감당하고, 또 30여명의 후손들이 찾는 묘사와 손님들로 북적이는 설'추석 명절 등 집안 대소사가 여느집 못지않게 많았다.
하지만 종부에게는 끊임없는 가족들의 병구환이 더 큰 일이었다. 예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탓에 병치레가 잦았던 시조부부터 중풍으로 몸져누워 버린 시어머니, 설상가상으로 셋째 아들마저 뇌종양으로 오랫동안 종부의 보살핌에 의존해야 했다.
시조부는 4년여 고생 끝에 돌아가셨다. 시집오자 말자 몸져누우셨던 시어머니도 8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종부는 시집오면서 곧바로 종가 곳간과 부엌살림을 도맡아야 했다. 초간종택의 예와 법도를 익힐 겨를도 없이 종부의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종부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셋째 아들이 열세살되던 해에 쓰러져 뇌종양 판정을 받은 후 25년의 고통스런 삶을 감당하다 지난 2007년 종부 곁을 떠나 버린 것.
"아파도 좋다. 부족해도 좋다. 내곁에만 있어달라는 마음도 부질없었다"는 종부는 가슴속 깊숙한 한쪽에 셋째아들을 위한 고통 없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진성 이씨 대종회는 지난 2004년 종부에게 '부도상'(婦道賞)과 금가락지를 수여해 종가 종부로서의 삶과 유가 여인네의 덕목을 잘 실천해 가문의 영예를 드높인 것을 칭송하고 아픈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다.
종부에게는 늘 따라다니는 일화가 있다. 곤궁했던 종가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집안에 여러개의 '양은냄비'를 사 두었다가 걸인(乞人)들이 밥을 얻어 먹으러 오면 양은냄비 한가득 양식을 담아 나눠줬다는 종부의 일화는 인근지역까지 소문이 자자하다. 지역 어른인 종가의 사람으로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신분에 맞는 베풂을 실천했던 것.
◆ 손님접대엔 소홀함 없어
종가의 형편은 곤궁했었다. 게다가 시조부님께서 일본에서 벌어 보내온 재산을 종손이 광산사업에 투자했다가 실패하면서 더욱 곤궁한 살림살이를 꾸려야만 했다.
하지만 종부는 원망하지 않았다.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 자리인 종가는 정작 부자보다는 대대로 학자가 나도록 배치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묵묵하게 종부의 책무를 다해왔다. 절약하고 또 절약했다. 그 가운데서도 접빈객, 집을 찾아오는 손님 대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했다. 심지어 적선하는 집안은 후세에 복이 있다는 선인들의 말을 가슴에 새겨 '양은냄비' 베풂 등으로 인정을 아끼지 않았다.
종부는 "친정에서는 어려운 줄 모르고 살았다. 시집오자 마자 살림을 맡았고 종손의 사업실패로 어려웠지만 견뎌내고 극복해야 했다. 종부라기보다 한 가정의 아내, 엄마였기 때문이다"고 한다.
"요즘에는 고택협의회 등에서 한차례씩 문화재 청소나 관리를 해주고 있다. 게다가 정부나 경북도, 예천군 등 행정기관에서도 종가'종택'종부'종손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 세대가 유교적 삶을 살아온 마지막 종가 여인네가 될 것"이라 한다. 이 때문에 종가와 종택에 대한 관리와 종손'종부의 삶에 대한 체계적 자료화가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초간종택은 퇴계 선생 문인으로 우리나라 최초 백과사전인 '대동군부운옥'(보물 제878호)을 저술한 초간 권문해(1534∼1591) 선생의 집이다. 선생의 할아버지 권오상이 지었다. 겉모습은 대체로 소박한 구조를 보이고 있으나 안쪽은 천장 부분에 설치한 여러 재료들을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해 호화롭게 꾸미고 있다. 별당(보물 제457호)은 일반 주택건축으로는 보기 드물게 건물 안쪽을 장식해 꾸민 수법이 뛰어난 조선시대 건축이다.
짧은 시간의 만남에도 종부의 속깊음이 느껴졌다. 종부는 "그동안 고생스런 일이 어찌 없었고 가슴에 한이 없겠느냐? 그러나 그런 것은 종부로서의 일반적 삶보다 한 가정의 특수한 상황일 뿐"이라며 "교육에 특별하지 않았음에도 언론인과 한학자, 봉화 충재 종가 종부 등 훌륭하게 자란 자식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고 한다.
파란만장한 인고의 세월에 대한 한탄보다 편안한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종부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한국 종가 여인네를 찾을 수 있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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