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즐거운 책 읽기]남자의 탄생(전인권/푸른숲)

남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나는 착한 아들, 훌륭한 학생, 친절한 동료였다.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 나는 지난 몇 년 간 가족, 직장, 친구관계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실패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 실패의 원인을 찾기 위해 스스로 묻기 시작했다.'

정치학자 전인권은 현재의 자신을 만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그것을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찾아보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자신이 5세부터 12세 사이에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한 '남자의 탄생'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강원도 철원에서 자란 저자는 자신이 어린 시절 살았던 집과 방의 구조, 그 방에서 이루어졌던 일들에서부터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다. 늘 깨끗하고 질서정연했던 '아버지 공간'과, 약간 지저분하고 무질서했지만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만능의 공간이었던 '어머니 공간'. 아버지 공간은 모세가 제사를 올리던 지성소와 같은 엄숙하고 공적인 공간이었으되, 어머니 공간은 인간의 땀 냄새가 배어있는 통속적이고 사적인 공간이었다. 두 공간에서는 사용하는 언어도 각각 달랐다. 하나는 아버지를 대할 때 사용하는 존댓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를 대할 때 사용하는 반말이었다.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두 가지 마음, 두 가지 세계, 두 가지 자아, 두 가지 행동원칙을 갖고 있음을 의미했다. 또 그것은 무수히 많은 자아를 가졌다는 뜻도 되었다. 그런데 그처럼 많은 자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정작 자신만의 자아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고백한다.

'확실히 어머니와 나는 친밀했다. 말할 수 없이 친밀했다. 아니 두 사람은 친밀하다는 정도를 넘어, 어떤 끈끈함으로 뭉쳐진 부부 같은 데가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달랐다. 아버지는 자신이 걸어온 길과 비교하며 아들을 가르치려고만 했을 뿐 아들과 사귀는 방법은 몰랐다. 아버지는 '신분적 인간'이었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인간관계란 내면적 성찰이 아니라, '부자유친, 붕우유신, 부부유별'과 같이 외면적 차이를 기준으로 하는 인간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절대적 권력을 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허수아비일 때가 많았고, '지배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영국 왕'처럼, 권위 있게 군림하지만 물 위를 떠도는 기름과도 같았다.

어머니는 어땠을까? 어머니는 세 아들을 모두 극진히 사랑했는데, 세 아들은 모두 어머니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분리사랑. 저자는 정치학자답게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분리통치에서 같은 현상을 본다. 문제는 '따로 불러' 대화하는 방식이 너무 자주 일어나다 보면, 공동체의 연합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그것은 윗사람의 권력이 아랫사람보다 현저하게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권력 지향적 대화 방법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철저한 '분리사랑'을 하였으며, 저자는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다른 식구들로부터 체계적으로 격리된 '모성의 공간'에서 양육되었다. 저자의 어머니는 극진한 사랑을 통해 세 아들에게 동굴의 우상을 만들어주었다. 그 우상은 내가 '도덕적으로 선하며 훌륭한 사람이라는 우상'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우상', 최종적으로 '이 세상은 내가 의도한 대로 움직여져야 한다는 우상' 등이다.

'내 안의 아버지, 네 안의 아버지'를 살해하라. 실제의 아버지, 선배들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를 보아야 한다. 저자는 반성과 성찰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릴 것을 권한다. 자신이 얼마나 '동굴 속 황제'인가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마음에 형성되어 있는 어린 시절의 우상,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 아버지를 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기 드물게 솔직하고 대담한 자기분석이 돋보이는 이 '동굴 속 황제'의 성장기가 재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내 아버지 혹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신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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