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산성부터 펼쳐지는 암릉 퍼레이드
남덕유산에서 줄기를 뻗은 월봉산은 산줄기를 갈라 북동쪽으로 수망령을 거쳐 금원'기백을 이루고 남쪽으로는 함양에 황석'거망을 만들었다. 금원'기백산은 전형적인 육산(陸山)의 풍모. 유안청계곡을 끼고 올라가는 등산로는 산중턱까지 계곡이 이어지고 수림도 풍부하다. 반면에 거망'황석산은 바위산에 가깝다. 황석산성에서부터 펼쳐지는 암봉들의 스카이라인은 바위산의 굳센 기상을 보여준다. 마치 영남 선비의 표상 '칼 찬 선비 조식(曺植)'을 대하는 느낌이랄까.
함양'거창의 '까칠한 산' 황석'거망을 찾아가는 날 제일 먼저 겨울비가 일행을 맞는다. 겨울산과 비처럼 마이너스 조합도 없다. 체온유지 힘들고, 식사불편하고, 길 미끄럽고''' 하지만 음(-)과 음(-)이 모이면 양(+)이 된다지 않는가. 혹시 아는가, 함박눈 세례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
일행은 용추계곡을 들머리로 산행에 나섰다. 용추계곡은 금'기'황'거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계곡. 네 산의 중심에서 무게중심을 이루며 산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수승대, 위천계곡과 더불어 거창, 함양의 3대 계곡으로 통한다. 화림삼동(花林三洞)의 비경도 빗속에서는 빛을 잃는다. 오감(五感)도 우의(雨衣)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에 작동을 멈추었다. 용추계곡에서 거망산 입구 거망샘까지는 지그재그 오르막길의 연속. 잡목과 바윗길의 연속이다. 습기를 머금은 이끼, 물기를 밴 낙엽길은 무척 미끄럽다. 너덜 길을 뒹굴며 1시간쯤 올랐을까. 눈앞에 거망샘이 나타났다.
#여자 빨치산 정순덕 비화 서린 거망산
거망산은 여자 빨치산 정순덕의 일화로 유명한 곳. 6'25때 정순덕은 지리산 일대를 은신처 삼아 국군들을 괴롭혔다. 18세 새댁 정순덕은 남편의 겨울옷을 챙겨 산에 들어왔다가 전투에서 남편을 잃고 '산사람'이 되었다. 그 후 63년 체포될 때까지 남장(男裝)빨치산으로 불리며 수많은 전투에서 군경들을 괴롭혔다. 특히 거망-월봉산 전투에서 국군 1개 소대를 생포한 후 무장해제시켜 하산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산은 역사의 비극에서 비켜선 채 운무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미 사위(四圍)는 안개로 자욱하다. 정상근처에서 치열했던 전투흔적만 더듬을 뿐.
지장골 삼거리 근처에 왔을 때 비가 좀 잦아들었다. 밥 때를 챙겨주시는 산신께 감사하며 일행은 재빨리 점심상을 폈다. 감사기도도 잠시 반찬을 펴놓기가 무섭게 빗줄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다시 옮기자니 번거롭고 그냥 먹기로 했다. 빗속 오찬도 이벤트라면 이벤트라고 자위하면서. 빗물에 산발이 된 김밥, 김치그릇에선 빨간 국물이 튀고'''. "이런 게 바로 빨치산식 식사구먼!" 일행은 조크로 찬밥 오찬의 씁쓸함을 달랬다.
서서히 저체온 증세가 오기 시작한다. 저체온에 '다동'(多動)이 최고. 일행은 서둘러 황석산으로 향했다. 뫼재, 북봉을 거쳐 거북바위에 이를 무렵 자욱한 안개 속에서 황석산성이 형체를 드러냈다.
#황석산성, 16세기 정유재란 비극 간직
함양과 남원의 경계를 이루는 육십령은 가야시대 백제와 신라의 요충지였고 황석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영호남의 관문이었다. 정유재란(1598년)때는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전주방향으로 진출하려다가 이곳에서 조선의 민관군과 대립했다. 이 전투에서 안음(安陰)현감 곽준은 절명시를 남기고 가족과 함께 전사했다고 '징비록'에 기록되어 있다. 성이 함락되자 부녀자들은 적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깨끗이 죽겠다며 절벽으로 뛰어내렸다고 전한다. 지금도 현장 피바위엔 검은 얼룩이 그대로 남아있어 오가는 이들이 그 흔적을 제단 삼아 추모의 묵념을 올린다.
일행은 비바람을 뚫고 황석산으로 향한다. 제대로 된 비옷을 준비하지 못한 회원은 양말까지 축축하고 비옷을 갖춰 입은 회원들도 땀에 흠뻑 속옷까지 젖었다.
황석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거대한 바위길. 몇 가닥 로프에 의지해 힘겹게 올라 겨우 '인증샷'을 찍었다. 정상에는 때마침 강한 바람이 불어 잠시 동안에도 체온이 뚝뚝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겨울 산에서 저체온은 저승사지로 불린다. 체온을 유지하느라 산행길 내내 아마도 2, 3분도 여유 있게 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시구목길 삼거리를 돌아 취재팀은 본격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하산지점인 유동마을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한다.
망월대를 지날 무렵 비가 조금 누그러졌다. 길은 여전히 미끄럽고 옷은 엉망이 되었다.
그나마 우의를 때리는 빗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비옷을 벗으니 그제서야 새소리도 들리고 낙엽 밟는 소리도 청량하게 와 닿는다. 무엇보다 물기 걷힌 안경 너머로 초겨울의 산속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겨울 산행 방풍'방수 장비 필수
1시간쯤 걸어 하산종점인 유동마을에 이르렀다. 평화로운 산촌마을이 빗속에 정겹다. 하지만 축축한 옷에 한기까지 들어 경치를 느낄 여유도 없다. 다들 필수의례인 하산주도 마다하고 바삐 차에 오른다. 이로써 6시간에 걸친 빗속산행이 모두 끝났다.
겨울산과 비의 끝없는 불협화음. 결국 함박눈의 반전(反轉)도 겨울비 낭만의 이벤트도 없었다. '산밑 가랑비는 정상 눈보라'라는 상식을 믿기에 계절은 너무 일렀다. 가을비 낭만이나 겨울비 우수(憂愁)도 결국은 산 밑에서의 일이요 산속에서는 그저 불청객일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얻은 것도 있다. 김치 국물이 홍수를 이뤘던 빗물 반(半) 밥 반의 오찬은 평생 추억으로 간직하게 됐다. 또 겨울 산에서 방풍, 방수장비는 생명과 직결된다는 상식도 현장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없어봐야 가치를 안다 했던가. '뽀송뽀송'이라는 어휘가 그때처럼 절실하게 다가왔던 때도 없었던 것 같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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