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작 영화 리뷰] 여배우들

'레드카펫' 화려함 뒤에 숨겨진 그녀들의 눈물·웃음

영화는 좋았다. 하지만 관객들은 형편없었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TV 토크쇼를 찍듯이 영화를 만든 덕분일까. 영화는 진지함을 잃지 않았고, 여배우들은 솔직담백한 이야기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너무 토크쇼처럼 비춰진 탓인지 관객들은 안방에 앉아 TV를 지켜보는 착각을 한 모양이다. 상영시간 내내 여기저기서 쑥덕거렸다. "어머 쟤가 저래서 이혼한 거야?", "내숭 장난 아니다.", "잡지에서 봤는데 저거 진짜래." 등등. 짜증이 날 정도였다. 영화 품평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촬영 전부터 시작된 기 싸움

영화 '여배우들'의 촬영 시점은 200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날 패션지 '보그' 특집 화보 촬영을 위해 20대부터 60대까지 세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여섯명이 한 자리에 모인다.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배우들은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일단 60대를 대표하는 패션 리더이며 카리스마가 작렬하는 윤여정. 나름 잘 나가는 배우지만 패션지 특집 화보 촬영 제의를 받고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행여 늦을세라 가는 길을 재촉한다. 그러다보니 약속 시간보다 무려 45분이나 일찍 왔다. 후배 배우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막내 김옥빈은 일찌감치 촬영 현장 주차장에 도착했지만 들어가지 않고 다른 배우들이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장차 촬영장에서 벌어질 여배우들의 기 싸움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게다가 윤여정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매니저에게 "여운계 선생님이네. 같이 찍는다는 말 못 들었는데"라고 말할 정도. 물론 설정이겠지만. 맨 먼저 촬영장에 들어선 윤여정에게 촬영 스태프는 그저 태무심하고, "촬영장에서 담배 피우지 못한다"며 면박까지 준다. 겸연쩍어진 윤여정은 고현정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오라고 재촉하고, 집에서 뒹굴고 있는 고현정은 금방 가겠다면서도 굼뜨기 그지없다. 최지우는 전날 촬영 때문에 피곤해서 못간다고 했다가 괜스레 선배들 미움 사는 것도 걱정되고, 뒤에 따로 촬영해서 합성했다가 자신이 못나게 나올까봐 걱정돼 느지막이 촬영장에 도착한다. 하나 둘씩 도착하는 여배우들. 서로간에 덕담삼아 건네는 인사말 하나에도 가시가 돋쳐있다. 과연 촬영이 제대로 이뤄질지 의문스럽다.

◆고현정 VS 최지우

우여곡절 끝에 촬영이 시작되고 여배우들의 신경전도 점입가경이다. 서로 최고의 옷을 입겠다며 기싸움이 벌어진다. 이번 영화의 매력이 슬슬 드러난다. 잠시라도 대화를 쉬면 심심해질까봐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마치 김수현의 드라마를 보듯이 숨가쁘게 대화가 오간다. 연습을 한 대화가 아니다. 실제 촬영장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았다. 대충의 설정과 동선만 유지했을 뿐 완성된 대본을 보고 따라하는 연기가 아니었다. 키가 커서 옷이 잘 어울린다는 스텝의 말에 "미스 코리아 출신이잖아"라고 말해놓고는 겸연쩍은 듯 웃음을 터뜨리는 고현정, 행여 자신이 1차에 낙점된 것이 아니라 다른 여배우의 대타로 섭외됐을까봐 노심초사하는 윤여정, 나름대로 잘나가는 20대 배우들이지만 선배들의 기에 눌려 촬영 내내 말조심에 신경쓰는 김민희와 김옥빈,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이지만 가는 세월을 잡을 길이 없는 이미숙의 솔직담백한 이야기가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전체 사진 콘셉트는 '보석보다 아름다운 여배우'. 하지만 도쿄에서 촬영용 보석을 싣고 출발해야 할 비행기가 폭설로 연착되면서 촬영은 중단된다. 여배우들의 불만도 점차 고조된다.

특히 고현정과 최지우의 한판 대결은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시비를 거는 쪽은 고현정. 촬영장에 마련된 샴페인을 한두 잔 마신 그녀는 화장을 하는 최지우에게 다가가 싸움 아닌 싸움을 건다. 발끈한 최지우는 화장실에서 휴대폰으로 고현정 욕을 하고, 마침 화장실에 있던 고현정과 막말까지 벌이며 한 판 붙는다. 실제 관객들은 설정인지 실제 싸움인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화가 난 최지우는 말도 없이 촬영장을 떠나버린다. 앞서 다툼 중에 최지우는 고현정의 이혼까지 끄집어내며 맞불을 놓는다.

◆어디까지 설정일까 궁금

뒤늦게 군고구마를 안고 나타난 최지우와 때맞춰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눈. 배우들은 샴페인을 앞에 놓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영화의 백미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이혼을 경험한 배우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이 한쪽에 앉고 나머지 3명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는다. 한국 사회에서 여배우로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배우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뜬금없이 이혼 이야기가 나온다. 이혼한지 하도 오래돼서 이혼했는지조차 까먹었다는 윤여정. 전 남편이 자기를 쫓아내놓고 여기저기서 언론 플레이를 하며 자기 때문에 이혼했다고 떠들어대서 속상하다는 말까지 한다. 관객들은 저런 말까지 해도 되는지 아슬아슬하고 의아스러울 정도다. 이혼의 아픔을 경험한 3명의 배우들은 갑작스런 서러움에 눈물을 쏟고, 맞은편에서 지켜보던 후배들도 함께 아파한다.

영화는 배우들이 불쑥불쑥 쏟아내는 한마디, 한마디로 긴장과 웃음, 공감을 자아낸다. 후배들이 한류 스타로 등극하며 일본 시장, 중국 시장을 장악했다는 말에 "난 재래시장이나 지킬래"라고 말하는 윤여정, 서로의 라이벌을 묻는 말에 가감없이 '이영애'라고 말하는 고현정과 최지우. 영화 '여배우들'을 이끌어가는 핵심은 단연 고현정이다. 내숭인지 진심인지 분간이 안 되는 대사들을 가감없이 쏟아낸다. 별로 드러나지 않는 듯 매력을 발휘하는 배우는 이미숙이다. 여배우들의 솔직대담한 토크를 이끌어내는 MC 역할을 해냈다.

당초 '여배우들'에 섭외하려 했던 전도연은 "100일 된 아이가 도저히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사양했고, 송혜교는 중국 스케줄 때문에 출연하지 못했다. 결국 여배우 7명이 확정됐는데, 한명은 촬영 시작 나흘 전에 이유도 말하지 않고 갑자기 약속을 번복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여배우가 6명이다. 이재용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출연을 사양한 여배우가 10여명에 이른다"며 "순발력에 자신이 없거나 여배우들끼리의 기 싸움을 피하려고, 또는 단지 그런 조합에 끼고 싶지 않다며 사양했다"고 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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