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로부터 받은 키 DNA가 인생패배자(?), OMG(O MY God)!'
외모 지상주의가 극에 달한 대한민국. 그 현주소를 말해주는 단적 사례가 지난달 지상파 방송에서 발생했다.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여대생이 '키 180㎝ 이하는 루저남'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10명 중 7, 8명은 한순간에 루저(Loser)가 돼버렸다.
왜 키 때문에 이 고통을 받아야 하나. 10여년 전에도 방송을 통해 개그맨 이휘재와 이홍렬이 '롱다리', '숏다리'를 개그 소재로 활용해 키 작은 남자를 다소 조롱 섞인 농담으로 희화화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지 않았다. 아마도 큰 이유는 지금처럼 인터넷에서 여론이 들끓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생활에서 키 작은 남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대체로 두 가지 반응으로 압축됐다. '너무 과도한 반응을 보일 필요 없다'와 '안 그래도 열 받는데 기름을 붓네'. 아예 숫제 루저남이란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리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적잖았다. '키 하나 가지고 왜 루저냐'고 과감하게 반론을 펴고 나선 3인을 만나 허심탄회한 얘기를 들어봤다.
용기 있는 세 주인공은 박찬혁(33·동아백화점 영업지원팀 대리·165㎝)·박근성(32·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 응급처치교육담당·165㎝)·장우정(25·공익복무요원·아주대 휴학중·162㎝)씨.
◆'누워서 B컵 이하는 루저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쏘냐. 이들 3인의 항변이 이어졌다. 타고난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패배자란 낙인을 찍었으니 그 말은 한 쪽이나 여성들도 똑같이 당해야 하지 않냐는 것이 이들의 논리. 당연하다. 뿌린 대로 거두며, 팃포탯(tit-for-tat, 되갚음)이다.
박찬혁씨가 먼저 강펀치를 되날렸다. '누워서 B컵 이하의 가슴을 가진 여성은 루저'. 눈에 보이는 신체적 조건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남성도 여성에게 같은 눈길을 보낼 수 있는 것. 그는 "여자는 외모를 꾸미는 데 돈을 써야 하기 때문에 데이트 비용은 남성이 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데 이런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며 "그러면서도 남자에게 또 완벽한 외모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근성씨가 거들었다. 그는 '별로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왔는데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라며 운을 뗀 뒤, "남자들 역시 쭉쭉빵빵, 볼륨있고 늘씬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기대심리"라며 "하지만 공중파 방송에서 '루저남'같은 자극적인 발언을 걸러주지 못하고 내보낸 것은 큰 실수"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사실 저 역시 신문에 등장해 이 말을 하고 있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잘못된 편견과 사회풍토는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박찬혁씨는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실제 사회에서 차별이 있으니까 차라리 루저를 3급 장애인으로 정해 피해보상이나 혜택을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제안하기도 했다. 장우성씨가 한술 더 떴다. 그는 "인터넷에서 '키 얼마냐' 물어본 뒤, 키가 작으면 대화 상대로 인정조차 안한다"며 "때로는 직업선택에서도 키로 인해 제한을 받으니 실제 장애인 아니냐"고 얼굴을 붉혔다. 덧붙여 이런 말도 있다고 소개했다. '때리는 남자는 OK, 하지만 키작은 남자는 NO'.
이들은 외모만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서도 벗어나고 싶다. '초콜릿 복근', '꿀벅지' 등 최근 등장하는 용어들도 너무 자극적이며 몸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어 씁쓸하다고 했다.
◆놀랍게도 여자친구·아내는 장신녀
'키 큰 남자는 작고 아담한 여자를 키 작은 남자는 키 크고 늘씬한 여자와 만난다'. 적어도 이들에겐 근거 있는 속설이었다. 장우정씨의 여자친구 키는 175㎝로 롱다리 모델급이다. 장씨가 여자친구와 함께 데이트를 할 때면 불편한 시선이 꽂힌다.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는 대체로 이렇다. '저 남자 돈이 많은가 봐', '와! 저 키로 저 여자를 어떻게 감당하나' 등. 불편하기 그지없다.
장씨는 "처음에는 그런 시선도 싫었고, 키가 작다는 이유로 왜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익숙해졌다"며 "키가 작다고 해서 인생에 있어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그런 불공평한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난 이 키로 당당하게 살고 있으며, 외모로만 모든 걸 재단하려는 이 사회가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박찬혁씨 역시 아내의 키가 168㎝로 자신보다 크다. 장인과 처형은 키가 180㎝가 넘는 위너남(Winner男)이다. 결혼식 때는 아내는 굽이 전혀 없는 신을 신고, 자신은 보통굽보다 2, 3㎝ 더 높은 구두를 신어 키 차이를 커버했다. 그는 "높은 곳에 물건을 올릴 때 외에는 키가 작아서 생활하는데 불편한 것은 별로 느끼지 못한다"며 "아내 역시 키와 관련해 스트레스를 준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밝혔다.
박근성씨도 아내가 장신이지 않지만 평균 이상의 키며, 아들은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커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박씨는 "전 괜찮은데 사회에서 넌 괜찮으면 안 된다고 강요하는 것 같다"며 "'루저남' 발언 때문에 냄비처럼 들끓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외모의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로
이들은 공통적으로 말했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는 이런 격론이 필요없다. 그대로 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니까. 실제 바람도 그랬다. 톰 크루저가 이름처럼 톰크 루저(Loser)다. 그래도 그는 세계적인 영화배우로 위너 중 위너다. 실베스타 스텔론 역시 마찬가지며 배우 이병헌 역시 실제 키는 더 작다고 논란이 됐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톱 클래스이며 대스타다.
대머리 역시 마찬가지. 박찬혁씨는 "외국을 보라. 대머리 브루스 윌리스나 대머리에 가까운 숀 코너리, 니콜라스 케이지 등이 대머리라고 놀림받기보다는 오히려 섹시남으로 평가받는다"며 "외모를 가지고 흥분하는 사회가 되어선 안되며 그 사람의 진정한 매력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바랐다. 이들 3인 역시 자신이 매력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고, 이들을 제대로 아는 이들도 그렇게 여기고 있다.
이들 3인은 "우리의 이 담론이 다소 당혹스럽기도 하고 왜 루저남이라는 발언이 이 논란을 가져왔느지 모르지만 분명 비정상적인 우리 사회의 외모지상주의에 경종을 울려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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