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생계를 꾸려가는 것을 걱정해야 했던 2009년은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수많은 우여곡절과 사연들이 교차했던 한 해였다. 그러기에 올 한 해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과 평가는 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일 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옛날부터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했지만 교통과 정보통신기술의 급속한 발달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꾸어 놓고 있다. 우리 시대의 화두는 재빠른 혁신이다. 우리가 놓여 있는 환경의 급속한 변화에 맞추어 빠른 속도의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정부와 기업 부문은 물론이고 일상생활 영역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폴 비릴리오(Paul Virillio)라는 사회학자는 우리 시대의 주목할 특징으로 스피드를 들고 이 시대를 질주의 시대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일련의 기술적 변화가 스피드를 시대의 초점으로 만들었고 스피드의 증대가 공간 구분을 무의미하게 하는 등 우리 삶에 커다란 변화를 낳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시장점유율 1, 2위를 다투는 손해보험회사는 판매 전략으로, 자기들은 보험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스피드를 판다고 내세운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과 서비스가 소비자에게 호소력을 가지려면 상품이나 서비스의 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스피드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런가 하면 질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이 시간에 쫓기면서 허둥대는 삶을 살고 있다. 미국의 보스턴 컨설팅 그룹이 실시한 소비자 조사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이 된 여성의 47%가 시간 부족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한된 시간 내에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은 오늘날 대부분의 조직이 그 구성원에게 요구하는 핵심적인 사항이기 때문이다.
질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과 세상사에 대한 성찰의 여유를 가지기 힘들다. 그러나 한 해가 마무리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부족했던 점은 자신과 주위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못한 점이 아닌가 한다. 변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는 사회일수록 역설적으로 성찰의 의미는 더 커진다. 흔히들 급속하게 사회가 변화할수록 기존의 지식은 쓸모가 없다고 한다. 기존의 지식으로 새롭게 변화된 상황에 대응하기 힘들다는 것은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상황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지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상상력과 창의적 사고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새로운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변화된 상황에 임시방편적으로 대응하는 데는 그때그때의 순발력만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임시적인 문제해결을 넘어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해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순발력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질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상상력과 창의적 사고력이다. 그런데 그 상상력은 인간과 세상, 자기 자신에 대한 통합적이고 깊은 성찰 없이 나오기 힘들다. 질주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한쪽에서는 '느림의 철학'이나 '느림의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동차로 가면 순식간에 갈 수 있는 거리를 '올레' 길을 만들어 사람들이 '올레' 길을 걷고자 하는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느림의 생활은 사람들에게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인간과 세상에 대한 비판적 사고 없이 어떻게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을 창안해 낼 수 있겠는가? 무용(無用)의 학문으로 취급되는 인문학이 사회적으로 새롭게 주목받는 까닭도 바로 성찰의 학문으로서 인문학의 가치를 재인식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성찰의 시간은 사회적 문제해결방안을 창안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많은 사람이 경험하고 있듯이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살아가다 보면, 어느 새 자신이 존재하지 않고 사라져버린 삶을 살아가기 십상이다. 그러나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면 우리는 사고의 개체화를 통해 자기 삶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온전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2009년을 보내고 2010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다가오는 2010년에는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질주적 삶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성찰의 시간을 많이 가지기를 기대해 본다.
백승대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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