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부터 노래하기를 좋아했던 나의 꿈은 큰 무대에서 마음껏 노래하며 뽐내는 것이었다. 그 순박한 생각과 마음을 품고 음악대학 성악과에 진학했고, 부모님의 만류를 무릅쓰며 단기간 다녀오겠노라고 약속했던 해외 유학 생활은 연주활동에 더해 14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렸다.
나의 첫 유학지는 한국인이 아무도 없는 로마 근교의 작은 도시였는데, 당시 교통편이 좋지 않아 로마 싼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인 학교에 가려면 시외버스로 약 2시간가량 가야 했다. 체력이 약했던 나는 이탈리아어가 능숙지 못해 수업 시간에 대단한 집중을 해야 했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어 쓰러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학교를 졸업한 그 해 내게 참으로 행복하고 기억에 남을만한 일들이 많이 생겼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지도하고 이끌어주신 니노 보나볼론따 지휘자 선생님을 만났고, 첫 도전한 이탈리아 라티나에서 열린 쟈코모 라우리 볼피 국제 성악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본선 진출자들이 결과를 기다리는 중 1, 2, 3등 발표 전에 특별상에 내 이름이 호명된 것이다. 너무 기뻐 정신없이 무대 위로 뛰어 나가 특별상을 수상한 후 차례로 1, 2, 3등의 결과를 기다리는데, 러시아 소프라노가 1등에 호명되고 또 한 번 나의 이름이 호명됐다. 난 너무 긴장한 나머지 공동 1위를 수상한다는 심사위원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내 이름이 왜 호명되었는지 알 수 없어 무대 위의 다른 수상자들을 둘러보았다. 2, 3분가량 극장을 가득 메운 객석과 무대는 술렁이기 시작했고, 보다 못한 러시아 소프라노가 내게 상패를 같이 들자며 다가왔다. 내가 "왜" 라고 묻자, 그녀는 "너와 내가 공동 1등이야"라고 말해 주었다.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다. 두 가지 상을 한꺼번에 받은 것이다. 그 후 많은 콩쿠르에서 입상하였고, 나의 본격적인 무대 생활도 시작되었다. 넉넉지 않은 유학생활이었기에 관광 가이드를 배우려 로마 시내에 나갔다가 우연히 다른 도시의 선배와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 선배는 "너는 노래를 해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라며 호된 꾸지람을 하시고는 장학금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큰돈을 건네 주시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과 감사에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후 무사히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지금은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열심히 노래 활동에 전념할 수 있기까지는 그 선배의 배려와 같은 주위의 따뜻한 성원이 큰 힘이 됐다.
류 진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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