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아버지에게

아버지, 날씨가 많이 춥네요. 바람도 무척이나 매섭고요. 오늘 따라 불어대는 매서운 칼바람 때문인지 자꾸만 아버지 생각이 나네요. 바쁜 일상도 일상이지만 오늘은 따뜻한 녹차 한잔 놓고 곱게 우려진 연두색 녹차 위에 아버지 얼굴 한번 띄워 봅니다.

제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아버지께서는 인정(人情)에 이끌린 '보증' 때문에 재산을 모두 날려버린 상태에서 어린 저희 남매를 이끌고 이집저집 셋방살이를 전전하셨지요. 아버지께서 돈 한번 만져보지도 못하고 떠안게 된 남의 빚, 그것이 우리 가족들을 얽어맨 멍에였고 그후로 우리 가족의 시련이 시작되었지요. 수입이라고는 아버지께서 찬바람 부는 공사 현장에 나가서 받아오시는 일당이 전부였고 아버지의 손톱 밑에는 진회색 시멘트 가루가 빠져나올 날도 없이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지요.

그런 환경 탓에 저는 개인 과외는커녕 학원 강습 한번 받아보지 못했지만 운좋게 법대에 진학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집안 형편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요. 남들처럼 군대를 다녀온 저는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때만 해도 한권에 3만, 4만원 하는 책값조차 너무도 부담이 됐어요. 그래서 선배들이 폐지수거함에 버린 책들 중에서 깨끗한 것들만 남들 몰래 가지고 와서 지우개로 지우고 깨끗하게 책꺼풀을 입혀서 공부했는데 이제는 그 시절이 한 장의 좋은 추억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 '내가 자식들한테 해 줄 거라고는 이거밖에 없다'라고 하시며 그 추운 겨울날, 칼바람을 맞아가며 직접 산사(山寺)까지 걸어가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차가운 마룻바닥에 엎드려 저희 남매를 위해 백일기도를 하셨다지요. 아버지의 그런 기도가 없었다면 제가 큰 고생하지 않고 단번에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영광도 없었겠지요. 사법시험 합격의 소식이 들렸던 그날, 아버지께서는 난생 처음으로 제가 보는 앞에서 눈물을 보이셨어요.

그후로는 기쁜 일로만 몇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작년 이맘때 우리에게 또 한번의 시련이 다가왔지요. 그날도 오늘처럼 칼바람이 세차게 불었습니다. 대학병원 주치의로부터 '아버지의 담낭에서 암이 발견되었으니 당장 수술해야 한다'는 연락이 왔지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세상이 너무도 원망스러웠습니다. '이제 시작인데, 우리 가족 이제 따뜻하게 살 수 있는데… 도대체 왜?'

며칠 후,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아버지께서는 수술실로 들어가셔야 했지요. 입원실에서 수술실 문 앞까지 이동하는 순간, 아버지께서는 불안한 모습을 감추려 애써 웃음을 보이셨지만 정작 수술실 문이 열릴 때엔 어머니와 제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려 하셨고 결국 제 앞에서 두 번째로 눈물을 보이시며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셨지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끝까지 제 이름을 부르시며….

눈물을 참을 수가 없더군요. 아니, 눈물이 멈추지가 않더군요. 너무도 목이 메어 물 한모금조차 삼킬 수가 없더군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그냥 흘려버리는 것과, '우리 아버지 제발 살려 주세요'라는 독백을 수천 번, 수만 번 반복하는 것뿐이었답니다.

지옥 같은 5시간이 흐른 후 수술은 대성공으로 끝이 났고 아버지께서는 회복실로 돌아오셨지요. 지친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계시는 아버지의 눈가에는 5시간 전에 수술실 문 앞에서 당신께서 흘리셨던 눈물이 마른 흔적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마취가 덜 깬 당신의 손을 잡고 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말씀드렸지요. "아버지, 살아주셔서 너무도 고맙습니다. 이제는 제가 다 해드릴게요. 부디 오래오래 사세요"라고요.

벌써 1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께서는 건강하게 생활하시며 그 약속을 지켜 주셨는데 저는 바쁜 일정을 핑계 삼아 1년 전의 약속을 아직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네요. 이래서 어른들께서는 '자식은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하지만 다시 한번 약속드릴게요. 아버지, 부디 오래오래 사세요. 제가 좋은 것으로만 다 해드릴게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영원히 사랑합니다.

하경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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