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설] 준예산 예고, 국회의 직무유기다

이명박 대통령이 준예산 집행에 대비한 준비 작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연말까지 예산안이 처리되지 않을 경우 내년 1월 1일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준예산 집행 지침 등을 심의 의결토록 준비하라는 지시다. 헌정 사상 초유의 준예산 집행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준예산 제도는 지난 1960년 내각책임제 하에서의 국회 해산 상황에 대비해 도입됐으나 실제 편성된 적은 없다.

정부는 지금껏 한 번도 편성해 본 전례가 없어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 헌법과 국가재정법 외에는 준예산 집행과 관련한 규정이 없어 써도 되는 돈인지 안 되는 돈인지 명확하지 않다. 준예산으론 일부 공무원의 임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준예산으로 간다면 공무원들의 봉급도 전체적으로 유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누구는 받고 누구는 지급이 안 된다면 그것 또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준예산 집행 시 상당한 혼선이 불가피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산안 처리가 늦어질 경우 저소득층의 생활고가 더욱 가중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내년에 새롭게 예산을 받아 시행하는 신규 사업은 일단 올스톱될 수밖에 없어 정부의 재정지출에 의존해 생활해야 하는 빈곤층이 우선적으로 타격을 받게 된다. 또 상당 기간 재정지출의 축소가 불가피, 경기회복세와 대외신인도에도 악영향이 예상된다.

야당은 이 대통령의 발언을 야당에 대한 협박이라고 비판하며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대통령이 뭐라든 대운하 예산은 통과시켜선 안 된다는 입장은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의 대야 협상 대표는 회의 직후 '벽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답답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처럼 과거 여야가 평행선을 달릴 때도 예산안 처리에는 협조했다. 국가 살림을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다. 민주당 조경태 의원은 '국민이 여당을 뽑아준 것은 국정 운영을 책임지라는 의미'라며 '야당이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동료 의원들을 설득하고 있다.

예결위 계수조정소위조차 구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물리적으로 연내 예산안 처리는 쉬운 일이 아니다. 처리되더라도 예산의 조기 집행은 어렵다. 결국 국회가 예산안 심의라는 스스로의 권한과 임무를 버린 셈이다. 대화와 소통 대신 단절과 극한 투쟁으로 질주하는 우리 국회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법정 기한은 아예 무시하는 잘못된 악습과 직무유기는 국회를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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