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작리뷰] 전우치

좌충우돌 망나니 도사님, 세상을 웃기려 500년을 건너오다

한국영화의 흥행공식이 떠오르는 영화다. 공식에 맞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뭔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최초의 한국형 영웅물'을 표방하는 '전우치'는 비록 나름의 영웅을 탄생시키기는 했지만 '최초'라는 수식어의 부담이 너무 컸나보다. 스토리 얼개는 느슨하고, 액션은 산만하며, 결말은 강렬하지 못하다. 136분이라는 상영 시간이 그다지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뭔가 더 있을 텐데'하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하지만 결국 제대로 된 클라이맥스를 보여주지 못해 허무함만 남았다. 한국영화의 가장 중요한 흥행공식은 코믹과 감동이다. 우리 관객은 울고 웃기를 좋아한다. 얄팍한 대사와 슬랩스틱 코미디 장면 속에 간간이 터져나오는 웃음은 가볍기 그지없고, 장황한 스토리 전개 속에 감동은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도 '전우치'는 잘 짜여진 영화다. '전우치전'을 모티프로 삼았지만 100% 새롭게 창작한 천방지축 악동 도사 이야기는 신선하다. 컴퓨터 그래픽도 그럭저럭 봐 줄 만한 수준이었다.

▨영화 속에서 되살아난 전우치

백과사전에 등장하는 전우치는 실존 인물로 나온다. 중종 때 서울에서 미관말직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송도에 은거하며 도술가로 널리 알려졌다. 백성을 현혹시켰다는 죄로 옥에서 죽었는데 뒤에 친척들이 이장하려고 무덤을 파보니 빈 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소설 '전우치전'에서 주인공은 임금을 속여서 황금을 얻은 뒤 빈민을 구제하고, 구름을 타고 사방으로 다니며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기도 했다. 훗날 조정에 들어가 선전관이 된 뒤 도적 괴수와 역모를 꾀한 자들을 붙잡아 오지만 간신들의 음모에 휘말려 극형에 처할 위기에 놓인다. 족자 속 그림의 말을 타고 도망친 전우치는 서화담이 도학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고, 화담의 도술에 걸려 곤욕을 당한 뒤 그의 제자가 됐다. 이후 전우치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계속 선도를 닦았다고 한다. 비록 도술가라고 하지만 전우지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굶주린 백성을 돕고난 뒤 '절대 나의 공을 칭송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는 나는 처사 전우치다'라는 방을 붙여 자기 자랑에 급급했던 인물이고, 상사병에 걸린 친구를 위해 여인을 보쌈해 놓고는 정작 자신이 그녀에게 반해 친구에게 다른 여인을 데려다주기도 했다. '타짜' '범죄의 재구성'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은 이런 전우치를 친근한 영웅상으로 영화 속에서 되살려냈다. 원작에서 스승이었던 서화담은 '화담'이라는 라이벌로 다시 태어났고, 빈민구제가 아닌 요괴 소탕이 전우치의 지상과제로 떨어진다.

▨도복 입고 서울을 활개 치는 전우치

머나먼 옛날,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괴를 봉인하기 위해 한 고매한 도인이 3천일 동안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을 분다. 하지만 멍청한 신선 세명이 날짜를 잘못 계산해서 하루 먼저 요괴들을 가둔 문을 열게 되고, 세상으로 뛰쳐나온 요괴들은 만파식적을 빼앗아 사라진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조선조 어느 해, 만파식적의 행방이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당대 최고의 도인으로 알려진 화담(김윤석)은 신선들의 부탁을 받아 만파식적을 뒤쫓는데. 이 즈음 세상을 어지럽히는 천방지축 악동도사 전우치(강동원)의 이름이 서서히 알려진다. 옥황상제의 아들을 사칭해 궁궐에 찾아가 임금을 능멸하는 장면은 영화 전반부의 백미다.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귀공자. 분위기는 엄숙하고 경건하지만 마치 동네 아이 꾸짖듯이 임금의 뒤통수를 내리치며 말도 안 되는 일장연설을 해댄다. 궁중음악을 연주하던 악사들은 전우치의 손가락질 하나에 장터에나 어울릴 법한 시끌벅적한 음악을 들려주며 흥겨운 분위기를 돋운다. 임금을 실컷 골려 먹은 전우치는 보물을 챙긴 뒤 족자 속 말을 타고 사라져버린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임금은 전국 도사들에게 전우치를 잡아오라고 명령한다.

전우치의 뒤를 쫓던 화담은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벼랑 끝 움막에 살고 있는 천관대사(백윤식)를 찾아가고, 거기서 천관대사의 제자인 전우치와 맞닥뜨린다. 우여곡절 끝에 만파식적을 되찾은 신선들은 천관대사와 화담에게 둘로 나뉜 만파식적을 맡긴다. 하지만 어느 날 천관대사는 죽임을 당하고 피리 반쪽도 사라지게 된다. 범인으로 몰린 전우치는 500년간 그림 족자에 봉인되는데….

▨아쉬움이 남는 최초의 한국형 영웅물

500년이 지난 2009년, 요괴들이 다시 세상을 어지럽히기 시작한다. 화담의 행방을 찾지 못한 신선들은 요괴를 잡기 위해 족자 속에 갇힌 전우치를 다시 불러낸다. 500년 세월이 흐른 세상을 보는 전우치와 그를 따르는 개 인간 초랭이(유해진)의 좌충우돌이 웃음을 자아낸다. 물론 억지스런 부분이 많아 재미를 반감시키는 역효과도 있기는 하다. 아무튼 족자에 봉인되기 전 미래를 암시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진다. 조선시대 전우치가 보쌈을 했던 여인을 보고 천관대사는 "너를 죽음으로 이끌 여인"이라는 말을 남겼고, 화담에게는 한 미치광이 노파가 "옆구리에 복사꽃이 필 때 죽을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보쌈 여인은 2009년 영화 배우를 꿈꾸는 서인경(임수정)으로 환생한다. 물론 본인은 자신이 과거에 누구였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전우치가 요괴를 쫓는 와중에 보쌈 여인과 재회하고, 전우치의 라이벌 도사로 등장한 화담의 실제 정체를 신선들이 알게 된다. 거리의 액션 장면은 눈요기에 적합하고, 외국 영웅물과는 달리 마치 만담을 주고받듯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전우치와 초랭이의 대화는 귀를 즐겁게 한다. 서인경의 역할은 모호하다. 굳이 필요했을까 싶을 정도다. 초랭이가 인간으로 변하기 위해 전우치를 배신하는 장면과 다시 그에게 돌아오는 부분은 극적 효과가 떨어진다. 다만 다소 멍청한 신선 세명으로 등장한 송영창, 주진모, 김상호는 자칫 무미건조할 뻔한 영화에 잔잔한 재미를 더하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화담 역을 맡은 김윤석은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무게감을 더했다. 주인공 강동원은 평가하기가 애매하다. 원래 전우치라는 캐릭터가 그렇기는 하지만 좌충우돌이 지나쳐 가볍게 보일 정도다. 망나니 영웅을 그린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핸콕'이 떠오른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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