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지금은 은퇴의 계절

대구권에서 직원들에 대한 대우가 가장 좋다는 대구은행. 이곳에는 크리스마스 이브이면 '한겨울 매서운 칼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엔 은행을 그만둬야하는 임원들의 명단이 통보된다. 대구은행 사람들은 이를 두고 '크리스마스 대학살'이라고도 부른다. 올해는 8명이 캐럴이 신나게 울려퍼지는 크리스마스 이브, 짐을 꾸렸다. 만으로 치면 쉰세살의 임원도 포함돼 있다.

퇴임 임원 명단이 뜬 직후엔 신임 임원이 발표된다. 불과 몇 자리 안되는 신임 임원 명단이 나오면 임원이 되지 못한 만 쉰네살(올해는 1955년생) 직원들이 보따리를 싼다. 명예퇴직을 해야하는 것이다. 올해는 20여명이 그 대상이다.

"은행은 퇴직금이 많으니 뭐 걱정이겠냐"고 묻겠지만 퇴직금 중간 정산으로 인해 명예퇴직하는 은행원들이 챙겨나가는 돈은 아무리 많아야 명예퇴직금 2억원 정도가 전부다. 평균 수명이 여든을 넘나드는 요즘, 30년 가까운 백수생활을 할 것이라고 가정하면 2억원은 결코 넉넉한 돈은 아니다.

"장가가 늦었던 사람들은 아직 애들이 학교에 다닙니다. 돈 들어갈 일이 아직도 많은데 참 답답하죠." 명예퇴직 대상인 한 은행원은 가슴이 답답하다는 고백을 기자에게 했다.

각종 성과급이 많아 '잘만 터지면' 은행권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고소득을 누리는 증권가 사람들도 이 계절이 참으로 서러운 시기다. 기자가 아는 2명의 증권사 지점장도 최근 지점장 자리를 빼앗겼다. 40대 중'후반의 나이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다.

"지점장 안 하려는 사람도 많아요. 서울 본사에 들어가 부장 안하려는 사람도 셀 수 없을 정도죠. 왜냐하면 빨리 달릴수록 일찍 '잘리니까요.'" 기자와 친한 증권사 지점장은 천천히 가는 것이 최고라고 했다. 40대 후반의 그는 "자신도 수명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고 씁쓸해했다.

다른 해보다 유난히 춥다는 올겨울은 베이비붐(Babyboom) 세대의 은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다. 은퇴 연령이 가장 빠르다는 금융권에서 베이비부머들의 은퇴가 올겨울부터 본격화한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직후 태어난 1955년생부터 1963년생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 밀집도가 조밀한 집단이다.

한국전쟁 이후 55∼63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2010년 추계로 모두 712만명에 이른다. 총인구의 14.6%에 달한다.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로 불리는 '단카이(團塊)세대'보다도 30만명이나 많다.

문제는 이들의 은퇴가 아무런 준비 없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다수 기성세대들이 월급 받아 집을 마련하고 자녀들 공부시키는 데 모든 것을 바쳤는데 결국 퇴직에 임박했을 때 가진 것이 많지 않다. 금융자산은 거의 없고 유동화가 힘든 집만 덩그러니 남는다.

우리 노동문화는 또 어떤가? 재취업이라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자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요즘 세월이 얼마나 빠른가? 우리나라 봉급쟁이들의 은퇴는 도둑처럼 갑작스레 찾아올지 모른다.

"은퇴를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는 준비, 당신은 제대로 해놓으셨는지요?" 또 한 해가 가는 지금, 이 질문이 참으로 두렵게 다가온다.

최경철 정경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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