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음악 감상실 녹향(綠香)은 1946년에 문을 연, 우리 나라 최초의 고전음악 감상실이다. 그 시작은 예육회(藝育會) 회원이었던 이창수가 회원들의 모임 장소를 물색하다가 향촌동의 지하 다방을 마련하여 소장하고 있던 레코드판을 틀면서 비롯되었다.
예육회는 아주 오래된 단체이다. 이 단체는 여유를 가지고 장래를 내다보려는 사람들이 모여 스스로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고, 교육하자는 뜻으로 예술의 '예(藝)'와 교육의 '육(育)'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지금까지 1,500여 차례의 감상회를 가졌으며, 현재도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지고 있는 문화관광체육부에 등록된 단체이다. 그리하여 녹향은 예육회의 보금자리가 되었고, 레코드를 가지고 해설을 곁들인 고전음악 감상회를 열었으며, 때로는 근처에 있던 미국공보원에서 레코드 콘서트를 열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축음기판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6·25전쟁 이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LP판을 사용하였다. 그런 가운데 1940, 60년대는 지역 음악가들과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자리 잡았고, 1970, 80년대에 들어서는 음악 전공자나 학생들이 드나들면서 고전음악을 보급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뿐 아니라, 클래식 음반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녹향이 가지고 있던 음반들은 음대생들의 교재가 되었으며, 녹향과 예육회 활동을 통해 음악계로 진출한 이들도 적지 않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드나들던 유명 인사들도 많았다. 가곡 '명태'의 노랫말을 쓴 양명문, 피란시절 난로 옆 탁자에 앉아서 글을 쓰던 소설가 최정희, 강의를 마치면 곧바로 달려오던 양주동과 유치환, 음악 신청용지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던 이중섭, 그리고 허만하, 윤장근, 이찬기, 방훈, 서석달, 서병환 같은 이들이 단골이었다. 그뿐이랴. 당시 고등학생이던 권기호, 권영진, 노재학 같은 이들도 드나들었다. 휴전이 되어 피란 내려온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떠나고 난 뒤에는 박훈산, 박양균, 신동집, 이호우, 최광열, 강우문, 김종길 같은 이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밖에도 권태호, 김종환, 김진균, 박기완, 이점희 같은 이들은 직접 연주를 했었는가 하면, 음대생이던 김경윤, 김원경, 이기홍, 홍춘선 같은 이들은 음악계로 진출하였다.
녹향은 대구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피란살이에 지친 시인 묵객들과 음악 애호가들이 울울한 마음을 달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음악을 공부하던 학생들에게는 강의실이나 다름없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단골로 드나들던 사람 가운데는 우뚝한 음악가로 성장한 사람들이 숱하다. 또한 자신의 음악 감상실을 차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능 좋은 음향기기와 다양한 음반을 갖춘 마니아들도 많이 있다. 그만큼 애환이 깃들인 지역의 유서 깊은 명소라 하겠다.
그 동안 여러 곳을 옮겨 다니는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은 옛 대구극장이 있었던 건너편에 한국영상박물관과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어서 자리가 텅텅 비어 있다. 근자에 이르러 경영난을 견디지 못해 폐업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뜻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회원제로 운영하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또한 근자에는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교향악단의 지휘자들이 자원봉사로 나서서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주인 이창수는 어느새 아흔을 바라보는 호호야가 되었으니,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고전음악(Classical Music)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음반이 팔리지 않고, 감상실이 문을 닫는가 하면, 연주회에 가면 눈에 뜨일 정도로 빈자리가 많다. 특히 젊은 세대가 고전음악을 가까이 하려 들지 않는 데도 그 원인이 있다. 다들 고전음악이 어렵고 딱딱하고 따분하다고 생각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다가서면 길이 보인다.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고전음악은 가치 있는 교양이자 사람살이에 품격을 더해 주기도 한다. 더구나 국제화 시대에 고전음악을 모르면 제대로 대접받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삶에 품격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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