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이 '벌써'라는 낱말 안에는 많은 뜻이 있겠습니다만 대개 회한(悔恨)이 많을 듯합니다. 원래는 뉘우치고 한탄한다는 뜻이지만 그저 이러저러한 생각이 많아 아쉽고, 안타깝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멋진 1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한 해의 끝자락에서는 대개 겸손해지고, 아쉬움에 젖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온갖 잡생각에 시달리다가도 결국 그 끝에서는 또 1년이 지나가고 나이가 한 살 더 들었다는 생각에 아쉬움과 씁쓸함으로 마무리하기가 십상일 터입니다.
연말이면 단골처럼 거론되는 각 언론사의 10대 뉴스를 보니 역시 올해도 나쁜 소식이 대부분입니다.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 세종시 백지화 논란, 신종플루 대유행, 용산 철거민 대참사, 북한의 핵실험, 강호순 연쇄살인 등 우울한 내용이 줄을 잇습니다. 좋은 소식은 피겨 요정 김연아의 세계신기록 달성과 내년 G20 정상회의 개최 확정 정도일 뿐입니다. 나름대로 뒤돌아볼 새도 없이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간 1년일 텐데 왜 이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막막한 것일까요? 세상은 나날이 발전해 불편함이 점점 사라지고, 재화(財貨)는 모두 나눠 써도 남을 만큼 충분한데도 누구 할 것 없이 모자란다고 아우성일까요? 우리가 엇길을 바른 길로 착각해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선불교의 공안(公案)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삶의 본질을 이해했다고 믿은 한 제자는 젊은 나이에 스승을 떠나 여행을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제자가 돌아왔을 때 스승은 삶의 본질에 대해 물었습니다. 제자는 "산 위에 구름이 없을 때 달빛이 호수의 잔물결에 스며들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늙은 스승은 크게 화를 내며 제자에게 "너는 늙었고 머리는 백발이 됐다. 이빨도 몇 개 남지 않았지만 아직도 너는 삶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꾸짖었습니다. 제자는 눈물을 흘리며 회한에 잠긴 뒤 스승에게 삶의 본질에 대한 말씀을 구했습니다. 스승은 "산 위에 구름이 없을 때, 달빛이 호수의 잔물결에 스며든다!"라고 말했습니다.
말장난 같은 두 사제(師弟)의 말의 차이는 ','와 '!' 뿐입니다. 불교계에서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 두 부호에는 많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억지로 꿰맞추는 것 같지만 쉼표에서는 한 박자 쉬어가는 여유를, 느낌표에서는 격정이나 환희를 엿봅니다. 스승은 여유와 격정이 없는 깨달음을 질타하는 듯합니다. 인간성이 내재하지 않은 깨달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꾸짖는 것일 테지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사람 냄새가 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지고(至高)한 도(道)를 깨닫는다 한들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도 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속에는 사람이 설 땅이 없습니다. 스승은 쉼표와 느낌표만으로 제자에게 좀 더 너그럽고 사람다운 득도(得道)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루만 더 지나면 모두가 새 꿈을 꾸고 계획하는 새해입니다. 겨우 하루 차이인데도 시간을 대하는 느낌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은 참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아쉬움과 회한에 울적해 하다가 하루 만에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고, 그 각오를 다지는 것이야말로 너무나 사람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새해에는 온 나라에 사람 냄새가 폴폴 나는 일들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북이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고 소통하며, 실업률 제로, 노숙자 전무, 국민소득 3만 달러 돌파, 늘 화기애애한 정치권, 국민에게 겸손한 대통령의 모습 같은 뉴스들이 지겨울 정도로 쏟아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년의 끝자락 때는 10대 뉴스 같은 것이 없는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한바탕 꿈같지만 한 번쯤은 너무 심심했던 한 해로 기억되는 2010년이 됐으면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 늘 기쁨과 웃음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鄭知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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