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겨울, 오동꽃

집에서 차로 20여분이면 팔공산에 닿을 수 있다. 가까운 곳에 이렇게 큰 산, 팔공산이 있음은 얼마나 마음 넉넉한 일인가. 지난 한 해를 마무리 하고 또, 새해 계획도 세울 요량으로 팔공산으로 향했다. 준비 없이 떠난 걸음이기에 능선마다 눈도장만 꼭꼭 찍어 두고 오랜만에 동화사(桐華寺) 산문에 들어 본다. 대웅전도 뒤로 하고 하늘을 향해 우뚝한 심지대사 오동나무 먼저 찾는다. 너른 방석 같은 잎 다 지고, 꽃 다 지고 중창 불사하던 소음도 멈춘 날, 올려다 본 겨울 오후의 나무는 춥지 않다. 저 높은 가지 끝에 하늘을 새파랗게 걸어 놓고 바람 속에 당당히 서서 동안거(冬安居)에 깊이 든 오동나무보살.

심지스님이 절을 짓고자 할 때도 이런 겨울날이었다. 그때 오동꽃이 엄동설한에 보랏빛 꽃등을 밝히고 활짝 피었다고 한다. 스님은 때 아닌 오동꽃을 보고 상서로운 징조라고 생각하고, 이 절집의 이름을 '화려한 오동나무 절' 동화사라고 지었다는 창건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계절의 추위보다 마음의 추위가 더 큰 요즘이다. 이 겨울 찬바람 부는 절집에 서서 오동꽃, 그 환한 꽃등을 생각해본다. 새해가 시작되는 지금, 우리는 엄동설한의 가슴에 보랏빛 작은 꽃등 하나 밝혀보면 어떨까? 어두운 우리 마음에 꽃을 담으면 한 겨울에도 세상 온통 꽃 피어 환하지 않을까? 차가운 우리 마음에 꽃을 담으면 그 따뜻함으로 세상 온통 향기롭지 않을까? 그 꽃들이 만드는 환한 그늘이 우리 가슴에 상서로운 징조가 되어 새해 새날에 향기로움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기도객의 발길도 끊긴 산사에서 추운 가슴 안고 높고 차게 서 있는 저 적막한 오동나무, 바람 앞에 선 저 높은 가지야 말로 어쩌면 우리처럼 이 계절을 견디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모르게 새 잎을 품고 새 꽃을 품고 있는 가슴이 있기에 겨울 칼날 같은 바람 앞에서도 당당한 나무처럼, 우리는 시린 가슴에 상처 난 가슴에 새살로 돋을 겨울 오동꽃을 아무도 모르게 피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무슨 꽃을 품고 여기 칼바람 부는 산사에 서성이며 서 있는가. 겨울에 꾸는 봄꿈이 있기에 나도 이 겨울이 두렵지만은 않다. 당당하게 찬바람에 맞서며 오동나무 가지 끝 높고 찬 곳에 새 다짐 하나 든든하게 걸어둔다.

겨울 오동꽃을 생각하는 지금, 새해. 우리들 가슴에 환하게 필 2010년이라는 이름의 꽃, 어떤 색으로 어떤 향기로 오든 우리는 겨울 한복판에 서서 우리에게 상서로움으로 올 희망의 봄꽃을 꿈꾸어 보자. 비록 지금 바람 불고 춥지만 품은 꽃이 있기에 봄은 머지않았다는 것을 믿는다.

저물어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보니 먼 산자락이 환하다. 이 겨울 팔공산에서 누가 오동꽃을 피웠나보다.

김승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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