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세상의 모든 딸들

"나한테 그런 거 시킬 거면 공부 그만둬."

아이를 낳고 20여년 전 미국에서 뒤늦게 박사 과정을 시작했을 때 TV를 보고 있던 남편이 했던 말이다. 한번도 해본 적이 없던 집안일을 갑자기 시키니 그럴 법도 했겠지만 연구조교를 하면서 학업을 병행해야 했던 나로서는 남편의 도움이 절실했고 그의 그런 반응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 후 남편은 조금씩 육아와 집안일을 도와주기 시작했지만 곧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아이와 함께 미국에 남은 나는 아빠 역할까지 맡아가며 유학 생활을 계속했다.

끌고 다니던 고물차는 가다 말고 수시로 도로에 서서 나를 난감하게 했고 방과후 학교에 맡겨 둔 아이는 일이 안 끝나 데리러 갈 수 없어 발을 동동 굴러야했다. 마을에 연쇄살인사건이 터져 밤에 나가는 것을 자제해야 했음에도 혼자 어두컴컴한 실험실에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일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던 순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치던 나무 그림자에 놀라 그 자리에 서서 울던 일.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매일 아침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먹다 남은 빵을 가방에 꾸겨 넣고 학교를 가던 나는 아내가 정성스레 싸준 보온 도시락을 챙겨들고 느긋하게 학교로 향하는 남자들을 보며 부러워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지지 않기로.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보이지 않는 현실의 벽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열심히만 하면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던 지난날은 더 이상 없었다. 부딪혀 튕겨나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그만 그 앞에서 돌아서고 말았다.

스웨덴 의학연구위원회의 조사 결과(네이처, 1997)에 의하면 박사 후 연수지원자들의 경우 여성은 남성보다 2.5배 실력이 뛰어나야 같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2008년 국내과학기술분야 여성박사의 비율은 40% 이상인데 비해 연구책임자급 여성의 비는 9% 정도라는 통계조사도 있다. 결국 육아와 가사의 책임을 지닌 여성은 같은 일을 하기 위해 남성에 비해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함에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천장이 기다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비정규직 이공계 여성박사들의 네트워크가 2006년 첫모임을 시작으로, 2009년 12월 '유망여성과학기술인회'라는 명칭으로 사단법인화되었다. 박사급 여성과학자의 권익 보호 및 지위 향상을 위한 자체적 노력이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이 모든 것의 뒤에는 '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같은 기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변화는 아주 멀리서,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간절히 원하면 전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의 의미를 가르쳐주기 위해. 한 10년만 더 버틸 걸 그랬다.

백옥경 경북도립구미도서관 느티나무독서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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