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이 되면 대부분의 언론은 그동안 고심해서 기획한 여론조사의 결과를 발표한다. 여론조사야말로 세상의 흐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눈치다. 실제로 우리에게 여론조사가 일반화된 것은 그리 오래되진 않으나 한때 유력한 당의 대통령 후보를 확정하는 역할까지 했으니 여론 조사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올해만 해도 차기 대통령감이 누구냐부터 '내 집 앞 눈 치우기' 과태료까지 여론조사는 시시콜콜한 동향을 물어다 안방에 떨어뜨린다. 나 역시 갖가지 진미로 채워진 화려한 성찬(盛饌)을 들여다보듯 했는데, 여론조사 하나가 눈길을 끈다. 미국에서 날아온 조사이다. USA투데이와 갤럽이 미국인들에게 '현재 생존하는 남'여 중 누구를 각각 최고로 존경하느냐?'고 물었단다.
일찌감치 시민대중사회를 이룩한 미국답게 갤럽은 이미 1961년부터 이런 질문을 계속 했다는데 금년의 답변이 놀랍다. 남성에는 1위가 오바마 현 대통령이고 2위가 부시 전 대통령이다. 여성에는 1위가 힐러리 현 국무장관이고 2위가 페일린 전 부통령 후보이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전 대통령의 부인인 걸 감안하면 남'여 1, 2위가 모두 직간접적으로 대통령이란 호칭이 붙어있다. 존경하는(admire) 사람이 대통령이라니!
아무리 복 받은 국민이라 하더라도 전현직 대통령을 앞뒤로 꽉 채울 만큼 존경한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그러나 차츰 해괴하다는 생각이 든다. 순위 끄트머리에 베네딕토 교황이나 요즘 한창 성추문으로 언론에 끊임없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도 등재돼 있는 걸 보면, 정치인만을 조사대상으로 고른 게 아닌 건 분명하다.
우리가 흔히 '존경'이란 말을 쓸 때는 인격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것이다. 그런 존경스런 분을 보면서 우리는 자신을 비춰 보거나 삶을 배우고, 나아가 가치관을 조정하기도 한다. 인격은 무척 감각적이다. 그래서 인격적인 영향을 받으려면, 상대의 외면적인 면모나 행위보다 내면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가깝게 느껴야만 가능하다. 그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대통령 같은 거대한 통치체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에게는 인격적인 감동을 받기 어렵다. 그런 사람들은 내면을 느끼기 전에 표면적인 행동이 먼저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위가 높거나 뭔가 얘기가 되는 인물을 숭배하고 싶은 심리가 우리에게 깔려 있는 것 같다. 요즘처럼 다원적이고 미시적으로 분화된 사회일수록 오히려 크고 우람한 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선호하지 않나 싶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미신이나 신비주의에 기대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처럼 이 역시 아이러니다.
외형적인 우람함을 기리는 심리를 따라가다 보니, 오바마 대통령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떠오른다. 이 소설은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의 이야기다. 매일같이 자질구레한 놀이에 파묻혀 지내는 아이들은 다원적이고 미시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아이들의 일상은 소소해서 어떤 이데아도 없다. 그런 아이들이 우람한 폭군인 '엄석대'에 대해서만은 영웅으로 떠받든다. 심지어 엄석대에게 어떤 폭력성도 느끼지 못한다. 영웅은 단 한 명이다. 반장선거를 치를 때 엄석대는 거의 100%의 지지를 받는다. 왜 다원적이고 미시적인 감각의 아이들이 우람한 영웅을 필요로 할까.
요즘 세계는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더욱 세분화되었고 중심적인 담론도 사라졌다. 어느 것도 세계를 주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람한 것의 어떤 속성에 빠져들고 싶어한다. 미디어와 인터넷 등 무수한 커뮤니케이션들은 우리의 그런 기호와 손을 잡고 우람한 대상을 반복적으로 부풀리고 입체화시킨다. 입체화시키다 보니 그 대상은 정치인이나 운동선수나 배우들이 그렇듯이, 어느새 인격적으로 살갑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1960년대에 마샬 맥루한이 전자미디어가 문화의 형태나 사고(思考)의 결정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했는데, 이제 그 말을 '미디어는 인격이다'로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가 엄창석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