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일어서면 금방 배가 푹 꺼진다. 먹고 돌아서면 다시 배가 고파진다'는 메밀묵. '떠먹고 있는데도 배고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기없는 메밀묵은 허기진 배로 긴긴 겨울밤을 넘기던 그 옛날 보릿고개 시절의 말이다. 60, 70년대 별스런 야식거리가 없던 어려운 시절, 밤마다 골목길을 돌며 묵장수가 외치던 "메밀묵 사려어~" 소리도 이제 옛 이야기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은 비료나 농약이 전혀 필요치 않은 농작물이다. 그냥 씨만 던져두면 열매를 맺는다. 이러니 유기농이 되고 자연스레 무공해 농사가 된다. 이처럼 시답잖은 메밀이 요즘은 당당히 웰빙 곡식으로 명함을 쑥 내밀고 있다. 영양이 넘쳐 되레 음식이 병이 되는 현대인들에게 구황음식이 웰빙식품으로 각광받게 된 덕분. 메밀을 맷돌에 갈아 가마솥에 쑤어내고 하룻밤을 식혀내야 먹을 수 있는 메밀묵은 말 그대로 '슬로푸드'다. 먹은 만큼 살이 빠진다는 천연 다이어트 식품이기도한 메밀묵은 흔히 봉평을 떠올리지만 봉평 못잖은 곳이 경북에도 있다. 1970년대인 40여년 전부터 전통묵밥 한 가지만으로 승부를 낸 순흥면 '묵장수 할머니'의 삶은 아련히 떠오르는 우리 모두의 고향 이야기다.
◆봉평보다 더 유명한 순흥 메밀묵
"어서 오이소. 아이구 메밀묵이 이제 끓기 시작했니더. 곧 들어 갈테니 추운데 어서 방으로 들지요." 묵이 풀쑥풀쑥 끓고 있는 가마솥 옆에 앉아 나무 주걱을 열심히 저어대던 순흥전통묵집 정옥분(80·영주 순흥면 읍내리 339) 할머니가 바쁜 참에도 손님을 반긴다. 끓기 시작하면서 걸쭉해진 묵솥이 뻑뻑하게 걸어지자 주걱젓는 손이 더욱 바빠진다. 이윽고 장작불을 끄고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양은 방태기에 묵을 퍼담아 낸다.
"장작불이 세면 끓기도 전에 눌어붙어 덩어리가 일어나서 묵을 버려." 정 할머니는 은근한 장작불에 오랫동안 천천히 끓여야만 탱탱하고 탄력있는 묵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채로 메밀가루를 내 껍질을 걸러내고 가마솥 아궁이에 장작불 지피고, 묵 저어주고…. 건장한 젊은이도 힘에 부쳐하는 이 고된 작업을 40년씩이나 해왔단다. 요즘 들어서는 둘째아들 황기준(47)씨가 힘든 일을 돕고 있어 큰 짐을 덜었지만 옛날에는 맷돌에다 메밀갈던 일까지 직접했다. 모두 전통방식 그대로 묵을 만드는 순흥묵집은 하루평균 찾는 손님만도 수백명. 이른 아침부터 장사진이다. "닷되들이 한솥 끓이면 묵 4통 나와. 손님이 많을 때는 적어도 하루 네 솥은 끓여야지. 한 통이 30인분이니까 16통이면 얼마야?" 가벼운 아침부터 점심·저녁 식사로도 손색이 없으니 하루 손님 500명은 기본이다.
그냥 먹기에 쉬워 보이는 메밀묵도 남에게 팔라고 하면 쉽지 않은 음식이란다. 엄청 예민해서 식으면서 상해버리기에 묵을 퍼내 식힐 때부터 신경을 써야 한다. 특히 여름에는 선풍기 바람까지 쐬어 주면서 선선하게 식혀야 하고 빨리 식히려고 따뜻할 때 냉장고에 넣어 버리면 쉰내가 나서 못쓰게 된단다. 때맞춰 가게 되면 쫄깃한 묵누룽지도 맛볼 수 있다.
▲순흥묵밥의 비결은 '옛날 그대로'
"집에 온 손님들이 다들 맛있다고 해서 묵장사를 시작했는데 웬일인지 장사가 절로 되더라고. 나는 묵만 만들 줄 알지 장사는 아직도 잘 몰라." 몸져누운 바깥양반을 찾아오는 이웃 손님들에게 낼 게 변변찮아 묵밥을 대접한 게 정 할머니 묵장사의 시작이다.
처마끝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린 토담집은 흙벽 두께가 두자(60㎝)가 넘는다. 따뜻한 토담집 아랫목과 전통묵밥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장작불이 훨훨타는 가마솥 앞에 쪼그리고 앉아 먹는 것도 괜찮다. 노란 좁쌀이 알알이 박힌 고슬고슬한 밥을 따끈한 묵채에 마는 즉시 산골음식의 진수를 맛 보게 된다. 그 옛날 어려웠던 보릿고개 시절 가물가물한 향수가 오롯이 어려 있는 우리 음식이다. 순흥묵밥은 채 친 메밀묵에다 잘게 썬 신 김치와 무 생채를 고명으로 얹고 찢은 김과 총총 썬 파와 참기름 몇 방울을 뿌려 준 다음 노랗게 우려 낸 멸치육수를 부어 만든다. 곁들여 나오는 풋고추와 양파를 썰어넣고 매운 고추장에 무쳐낸 명태포 무침과 매콤달콤한 초장에 무쳐낸 도라지 무침도 일품이다. 무와 도라지, 숙주나물도 모두 이웃들이 생산한 토종. 어느 것 하나 꾸밈없는 맛이 정겨울 정도다. 쇠고기를 넣고 달인 간장 맛도 일품. 간장을 내기 위해 매년 콩 두 가마니를 삶아 메주를 쑨다는 정 할머니는 해마다 간장맛을 내는데 쇠고기 열근이나 쓴다고.
"정 할머니가 무거운 것을 들다가 허리를 삐끗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일을 잠시 거든다는 게 올해로 20년째라요." 눈이 소복소복 쌓인 장독대에서 간장을 떠내던 이원희(76) 할머니는 순흥묵집 정 할머니와 함께 손맛의 주인공으로 둘도 없는 짝궁이다.
"처음엔 묵밥 한 그릇에 5백원을 받았어. 그러다 손님들이 올리라고 할 때마다 5백원, 천원씩을 올려 이제 5천원을 받아요." 무허가로 묵밥집을 시작해서 3남1녀를 다 키웠다. 워낙 형편이 어려워 자식 공부는 변변하게 시키지 못했다지만 할머니는 그래도 모두가 장성해 그저 대견할 뿐이다.
◆순흥묵밥에 얽힌 슬픈 이야기
메밀묵밥에는 뼈아픈 이야기가 스며있다. 영주 순흥면은 조선시대 초까지 경북 행정의 중심인 순흥도호부가 있었다. 때문에 타지역보다 풍족해 집집마다 음식이 넘쳤다. 그러다 세조 3년(1457) 금성대군이 순흥도호부 부사와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는 거사가 발각되면서 순흥마을은 말 그대로 '묵사발'이 되고 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에 '피끝'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생겼다. 순흥의 바로 이웃이다. 몰락해 어려워진 마을엔 먹을거리가 항상 부족하니 주민들 대부분이 구황작물인 메밀에 의존할 수밖에. 그때부터 이곳 순흥엔 메밀묵밥이 유명해졌다고들 한다.
또 한 가지는 '태평초'다. 조선시대 4색 당파 싸움이 낳은 음식이다.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노론 측의 도움으로 즉위에 성공한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자 소론 측은 영조와 노론의 독살이라고 주장하면서 내내 영조의 정통성에 시비를 건다. 급기야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참극 이후 정조가 당쟁을 바로잡기 위해 내놓은 것이 탕평책이다. '왕은 가깝다고 쓰고, 멀다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재등용 원칙에서 나온 그때 음식이 바로 궁중음식인 탕평채(蕩平菜)다. 북인은 검은색이니 김 가루, 동인은 푸른색이니 미나리를, 남인은 붉은색이니 쇠고기를, 음식의 주재료인 청포는 흰색인 서인을 상징했다. 쇠고기와 청포묵을 섞어 끓인 탕평채를 두고 서민들은 돼지고기와 메밀묵으로 바꿔 '태평초'를 만들어 먹었다. 막걸리 안주로 기가 막힌다.
◆메밀묵의 재발견
손님이 많을 때는 하루 700∼800명이 찾아 온다. 다음날 손님들을 대략 가늠하고 하루 전 묵을 쑤어 놓아야 하니 정 할머니는 하루도 허리 제대로 펼 날이 없다. 순흥전통묵집 홍보를 위해 영주시청 조재길(51) 식품위생담당은 개인블로그(blog.daum.net/pginsamsa)까지 만들어 둘 정도로 적극적이다. 블로그에서 소개하고 있는 묵집은 순흥묵집 외에도 태평초 상표등록까지 해 둔 영주시내 '전통묵집'과 안정면 '자연묵집 풍경' 등 3곳이다. 전통묵집은 태평초가, 자연묵집 풍경은 묵밥과 함께 콩비지전이 일미다.
순흥전통묵집 정 할머니는 1년간 쓰는 메밀만 해도 100가마니가 넘는다. 한 가마니에 25만원, 연간 2천500만원어치의 메밀을 쓴다. 그러니 이웃에선 메밀갈이가 필수이고 멀리 안동 학가산 인근 마을에서까지 메밀을 사다 쓴다. 지금까지 쓴 대나무 채반만 해도 100여개나 된다. 모두 전라도에서 만들어 와 1개에 10만원씩 그 가격만도 1천만원이다. 명태포, 고추, 도라지 등 정 할머니의 순흥묵집에서 사들이는 우리 농수산물만 해도 적잖은 양이다. 겨울음식이던 메밀묵은 이제 사철음식으로 변신했다. 여름 휴가철이면 할머니 집 앞이 복숭아·배 등 특산물 판매장이 될 정도로 첩첩산중 시골에 사람들을 모아 오는 것만 해도 상받을 만한 향토음식 산업화의 역군인 셈. 요즘들 어 메밀묵을 싸달라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1회용 용기에다 묵을 포장해 주기도 한다. 054)634-4614.
향토음식산업화특별취재팀 최재수기자 biochoi@msnet.co.kr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강병서기자 kbs@msnet.co.kr 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사진 프리랜서 강병두 pimnb12@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한덕수 "24일 오후 9시, 한미 2+2 통상협의…초당적 협의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