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27일, 한 독립운동가 부부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00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던 땅이었던가. 안동 출신으로 알려진 권도인과 대구 출신 이희경 부부였다. 독립운동가 부모를 안장한 뒤, 장남과 막내딸 가족들은 부모의 고향을 찾아 나섰다. 그 자취를 찾아 몇번이나 나섰다가 번번이 허탕을 쳤던 안동과 대구가 목표였다. 10년 앞서 부모의 이민과 독립운동, 그리고 집안 찾는 이야기가 매일신문 특집으로 소개된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필자의 추적으로 숙제가 풀렸다는 소식을 들은 후손들은 흥분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노동이민은 1902년 시작됐다.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은 일본인 노동자의 임금이 높아 힘들어 하던 하와이 사탕수수밭 사정을 보고, 한국인 이민을 권했다. 이에 정부는 이민을 담당하는 수민원(綏民院)을 만들어 민영환에게 책임을 맡겼다. 1902년 12월 인천을 떠난 첫 이민자 가운데 86명이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농민과 배우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오죽했으면 붙박이처럼 살아가는 정착 농경민족이 그 먼길을 택했을까. 1905년은 이민의 전성기이자 끝나는 해였다. 일제가 통감부를 세우고 외교권을 빼앗은 뒤 한국인의 이민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한국 이민 때문에 일본인의 임금과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우려한 탓이다. 살길을 찾아 나라 밖으로 나가는 일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민들은 40여곳 농장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일요일만 빼고 매일 사탕수수밭에서 하루 10시간씩 일했다. 일당은 남자 67센트, 여자 50센트였다. 자치 조직이 생기고 나라가 무너진다는 소식에 이들은 애국금을 모았다. 1909년 안중근 의거 소식을 듣자마자 돈을 거두어 '대동위인 안중근전'(大東偉人 安重根傳)을 펴냈다. 국가는 이들을 돌보지 않았으나, 그들은 가슴에서 국가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뜨거운 가슴으로 조국을 품었다. 그렇게 이민사회의 독립운동은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권도인 부부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이민자 가운데 경상도 사람은 드물었다. 출발하는 곳이 먼 인천이고, 정보도 어두웠다. 그 속에 17살 소년 권도인이 있었다. 사실 이민 모집 나이에도 미치지 못한 어린 청소년이었던 그가 경북 산골에서 멀고먼 인천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경부선이 1905년 1월 1일에 개통됐으니, 그가 고향에서 대구나 김천까지 걸어가 막 개통한 기차를 타고 영등포역을 거쳐, 경인선으로 인천에 도착한 것이라 짐작해본다.
1905년 2월 13일 그를 태운 시베리아호는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는 사탕수수 밭에서 성실하고도 창의성이 뛰어난 청년으로 커갔다. 노동에 매달리다가 호놀룰루에서 가구 제조 기술을 배우고, 튼튼한 가구를 만들어 점차 이름을 알렸다. 이 무렵 그는 사진을 고국으로 보내 한 여성을 배필로 맞았다. 사진결혼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하와이의 조금 더운 날씨에 알맞은 커튼을 창안해냈다. 고국에서 쓰던 대나무 발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멋진 그림이 담긴 커튼을 발명한 것이다. 발과 실크스크린 같은 그림을 합쳐 놓은 듯한, 바람이 잘 통하면서도 그림이 담긴 커튼이 권도인의 노력으로 만들어지고 특허까지 받았다. 판매가 늘어나 샌프란시스코에 지사까지 열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다. 한두 번이 아니라 거의 평생을 그랬다. 독립운동 조직에도 직접 참가했다.
하와이의 독립운동에는 가슴 아픈 사연도 있다. 이승만을 신처럼 받드는 동지회와 그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국민회 세력이 그것이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은 사실상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을 정도이다. 1921년 이승만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미 20년 앞서부터 틀을 잡아왔던 동포사회가 두 개로 나눠지고, 그렇게 시작한 갈등은 애국심으로 뭉쳐진 동포사회를 찢어 놓았다. 한 지도자의 편 가르기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 두고두고 반성할 일이다. 이때 권도인 부부는 이승만 반대편에 섰다. 뒷날 광복을 맞고서도 그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도쿄 주재 한국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지만, 끝내 허가받지 못했다. 정치보복인 셈이다.
대한인 국민회에 속한 권도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보낸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두 아들을 모두 참전시켰다. 자신도 전쟁지원에 나섰고, 전시공채 구입에도 적극 나서 하와이 신문에 그의 이름이 거듭 보도되었다. 이희경도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모두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끝은 안타까웠다. 1947년 이희경이 교통사고로 죽고, 1950년 권도인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고생하다가 1962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이 뿌린 씨앗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이민자들은 새로운 땅을 개척하면서 자식들을 길렀다. 권도인·이희경 부부도 빈손으로 이민 와서 아이들 교육에 매달렸다. 특히 이희경은 공부하겠다고 사진결혼으로 하와이를 택한 신여성이었다. 그 덕분에 2세들은 하와이대학을 다녔다. 꿈도 꾸지 못하던 세계가 열린 것이다. 권도인과 이희경 부부는 2남 2녀를 두었다. 그렇게 뿌린 씨앗이 3세 11명, 4세 19명으로 늘어났고, 대부분 높은 학력을 갖고 고급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지금 5세가 태어나 자라고 있다.
맏아들과 막내딸이 80대 노인이 되어 가족들과 부모 고향을 찾아 나섰다. 대구신명여고에서 1회 졸업생 3명과 교사가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았다. 딸은 금방 어머니를 찾아냈다. 한동안 말이 하지 못했고, 흐르는 눈물을 굳이 감추지도 않았다. 교정으로 나와 발랄한 학생들과 어울려 사진도 찍었다. 이어서 떠난 아버지의 고향 찾기, 안동을 거쳐 영양군 석보면 북계 골짜기를 더듬었다. 그 어디에도 백년 전 아버지의 자취는 없었다. 농사짓는 마을 사람과 집들을 둘러보며 아버지의 향기라도 느끼려 했다. 백년 쌓인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듯한 날이었다. 어찌 이들만의 일이겠는가. 무너지는 나라를 떠난 많은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안동독립운동 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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