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이쑤시개와 박연차의 訟事(송사)

이쑤시개 한 개 때문에 정부가 4만 달러(5천만 원)의 국고를 소송비용으로 허비했다면 과연 그 소송 시비는 잘한 짓이었을까 어리석은 짓이었을까. 100여 년 전 프랑스에서 있었던 송사(訟事)의 내용은 이렇다(오래전 본란에서도 인용).

어느 변호사가 파리의 리옹역 화물 예치소에 이쑤시개 1개를 내놓으며 보관을 요청했다. 일손 바쁜 직원은 '누굴 놀리느냐'며 거절했고, 변호사는 즉각 그 직원이 직무상의 법적 의무를 태만히 했다며 고소했다. 간이 재판에서 최고재판소로 갈 때까지 20년이 걸린 이쑤시개 소송은 결국 철도 화물 보관 책임이 있는 국가가 패소, 소송비용 4만 달러를 국고(國庫)로 물어야 했다. 이 이쑤시개 소송을 두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과연 하찮은 시빗거리라도 끝까지 법을 준수해서 얻는 준법사회 구축의 이익이 그야말로 소모적인 시비(국고 손실)보다 더 소중한 가치냐는 것이다.

먼저 지난해 연말, 마약 밀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영국인에게 중국 정부가 가차 없이 사형을 집행한 사건을 두고 보자. 유럽인으로서 중국에서 사형이 집행된 것은 50년 만에 처음 있는 민감한 사건이었으나 10여 차례 넘게 사형 집행 면제를 요구했던 영국 정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형을 집행, 정치적 고려를 일축했다. 외교적 이익이나 정치'경제적 실익보다는 법질서의 가치를 택한 것이다. 그런 고집이 통한 건 중국이란 떠오르는 강대국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그만 나라 싱가포르의 비슷한 경우를 하나 더 보자. 1994년 일어난 속칭 '페이 사건'은 '마이클 페이'란 미국인 10대 소년이 길가에 세워둔 차량을 흠집 내고 도로 표지판을 훔친, 어떻게 보면 경범죄 정도의 범죄 사건이었다. 그러나 싱가포르 법원은 태형 6대에 징역 4개월을 선고했다. 즉각 미국 대사관과 당시 클린턴 대통령까지 나서서 선처를 부탁하고 외교적 압력을 넣었지만 태형 6대를 4대로 줄여 줬을 뿐 법대로 다 집행했다. 페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호한 법 집행보다 당시 싱가포르 총독의 '해명'이다.

'미국은 이미 거대한 항공모함과 같은 대국이다. 웬만큼 사회 법질서가 침해되고 흔들려도 침몰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작은 카누와 같은 나라다. 한두 명만 제멋대로 배 위에서 뛰게 내버려 둬도 금세 흔들리고 뒤집어질 수 있다. 우리에게는 안정과 법질서가 우선이다. 법대로 가야 하는 것이다.'

두 나라의 사례는 외교적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국법의 권위와 예외 없는 준법을 말하고 있다. 이쑤시개 송사처럼 비록 소모적 시비라 할지라도 법을 지키는 것이 더 큰 가치일 수 있다는 논리 쪽에 닿아 있다는 얘기다.

우리 법무부도 보름 전 이태원 대학생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페터슨이란 미국인을 소환해 달라는 범죄인 인도 청구를 미국 정부에 제기했다. 과연 미국 정부는 한국의 법적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것인가? 그 해답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 엊그제 박연차 게이트 범법자들이 항소심 판결에서 몽땅 1~5년씩 감형되거나 무죄로 풀려났다. 국회의원직 사표를 낸 야당의원들은 아직 국회를 들락거리며 피켓 시위를 일삼고 있고, 폭력 의원 처벌은 물건너간 지 오래다. 같은 용산 참사에 보상액이 경찰관 2억, 민간 희생자는 7억 원이다. 법치를 지킨 희생조차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본다.

미국 정부가 까막눈이 아닌 이상 다 들여다보고 있다. 친북세력이 설치는 한국은 싱가포르보다 더 위태한 카누 같은 나라다. 그런 나라가 법 알기를 우습게 알고, 어겨봤자 고무줄처럼 처벌하고 있으면 우방국조차 범인을 내줄 리 없다. 높은 국격(國格)은 경제지표뿐 아니라 준법의 엄정함에서도 국제사회의 평가와 위상이 달라진다. 원전 수주 같은 돈 버는 일도 좋은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다 끝나는 글로벌 시대가 아니다. 강력한 법치국가의 위상을 세우고 손해가 나더라도 지도자의 약속은 지켜지는 신뢰가, 더 큰 나라를 만들어 내는 시대다.

金 廷 吉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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