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雲門에서 華岳까지](4)대구권 분기점

비슬기맥 사룡산 최고봉, 영천-경주-청도 나누는 삼각점

흔히 생식마을로 더 많이 알려진 시루미기 마을. 산 꼭대기 바로 밑 해발 650여m 되는 높은 터에 자리한 모습이 매우 이색적이다. 마을 왼편 뒤가 사룡산 정상봉이고 오른편 뒤는 낙동정맥에서 비슬기맥이 갈라지는 분기봉이다.
흔히 생식마을로 더 많이 알려진 시루미기 마을. 산 꼭대기 바로 밑 해발 650여m 되는 높은 터에 자리한 모습이 매우 이색적이다. 마을 왼편 뒤가 사룡산 정상봉이고 오른편 뒤는 낙동정맥에서 비슬기맥이 갈라지는 분기봉이다.

사룡산은 지경재(아화고개)서 바로 보이지만 오르는 데 3시간이나 걸린다. 산 걸음이 시속 2㎞ 정도니 대강 6㎞쯤 되나 싶다.

그 노정(路程)에서 왼편(동편)으로는 오봉산을 거쳐 내려서는 산줄기가 줄곧 바라다보인다. 정맥이 사룡산 지나 단석산을 향해 가면서 동쪽으로 갈라 보낸 지맥이다.

그 능선과 취재팀이 걷는 정맥(지경재∼사룡산) 사이에는 경주시 서면의 한 골짜기가 형성돼 있다. 그곳 사람들이 흔히 '샘촌'이라 부르는 천촌리(泉村里)가 산에 가장 붙었고, 다음이 서오리(棲梧里), 골 출구 밖엔 면소재지인 아화리(阿火里)가 자리했다.

반면 같은 노정에서 오른편(서편)으로는 구룡산(675m)서 북으로 출발한 산줄기가 뚜렷하다. 비슬기맥서 그쪽으로 뻗은 첫 지맥이랄 수 있는 그 산줄기는 영천 대창면과 북안면을 가른다.

취재팀이 오르는 낙동정맥 구간과 그 산줄기 사이엔 매우 넓은 골짜기가 만들어져 많은 마을들이 퍼져 있다. 산 쪽에서부터 상리 당리 명주리 신대리 등등의 순으로 낮아져 가고, 그 좌우로도 도유리 효리 도천리 등등 여러 마을이 분포한다. 거기서는 일대 지형의 핵심인 사룡산-구룡산과 그 사이 비슬기맥 상의 '오재' '수암재' 등 잿마루가 선명히 짚인다.

그 마을들 중에서도 중심은 명주리(明珠里) 같았다. 다양한 가게가 갖춰지는 등 면소재지 마을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거기 있는 중요 기구들은 '명주'가 아니라 '원곡'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노인회관 경우 명주리 회관 바로 앞에 원곡회관이 따로 있기까지 했다.

도대체 '원곡'이 뭘까? 간혹 한 골짜기 안에 들어있는 몇몇 마을들이 '곡(谷)4리'니 '6동'이니 하며 한 묶음이 돼 연대감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도 그런 경우일까?

명주리 노인회관서 들은 얘기는 조금 뜻밖이었다. 이곳이 본래는 독립된 '원곡면'(原谷面)이었다는 것이다. 총 12개('경북마을지'에는 13개) 마을이 거기 속했다. 그러다 일제(日帝)가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북안면으로 합쳐졌다. 통폐합 100년이 가까워 오지만 '원곡' 사람들의 분별감은 여전하다는 얘기다. 얼마 전까지도 당제를 함께 지내는 등 공동행사도 숱하다고 했다,

어르신들은 "원곡서는 사룡산을 '전방산'(戰防山)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후삼국시대 혼란과 전쟁 전설이 깔려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산이 사룡산이라 불리게 된 연유로 꼽히는 '네 마리 용'은 '지경재'서 거의 다 올라 정상에 가까워졌을 때 솟아오르는 600m 전후 네 봉우리다. 정맥은 지경재를 출발한 후에도 오랫동안 100m대 높이를 유지하다가 막바지에 급등해 597m봉-640m봉-659m봉-686m봉을 잇따라 올려 세우는 것이다.

서로 간에 모두 5분여 거리로 밀집해 있는 이 봉우리들 중 두 번째 것(640m봉)의 남서 사면(斜面)은 절벽이고, 그 밑으로 고속철이 뚫고 들어간다. 부산성 터의 밑을 지나 고속도 건천나들목 남쪽 지점까지 6㎞ 이상 이어지는 '당리터널' 시작점이라 했다. 천촌리 골 안(숙재 북편)에는 그 터널용 시설이라는 길고 경사 심한 또 다른 터널이 뚫려있기도 했다.

세 번째 659m봉은 비슬기맥이 갈라져 가는 봉우리다. 낙동정맥은 이 봉우리만 통과할 뿐 사룡산 정상봉(頂上峰)은 비켜간다. 이 분기봉(分岐峰)에는 정상 표석(標石) 하나와 금속 이정표 하나가 서 있었다. 돌에는 '비슬지맥 분기점 / 656m / 2007년 5월 21일 청도산악회'라고 새겨졌고, 이정표에는 '밀양기맥 분기점 / 2007. 3. 18. / 부산 같이하는 산악회'라 씌어 있었다.

우리는 대구생활권을 중심에 둬 금호강 수계를 따라 '비슬기맥'이란 개념을 정립하려는 데 반해, 부산-경남 사람들은 밀양과 밀양강을 더 중시해 '밀양기맥'으로 설정하려는 모양이다. 정상석이 그 높이를 656m라고 널리 알리고 있으나, 1:5000 지형도는 분명 658.9m 즉 659m로 못 박고 있음 또한 명시해 둬야겠다.

지난달 다시 찾은 분기봉에서는 그 건너 오봉산 '주사암' 스피커 염불 소리가 아주 가깝게 왕왕거렸다. 오봉산과 사룡산이 지호지간(指呼之間)임을 실감케 하는 풍경이었다.

그 다음 닿는 사룡산 정상봉(686m)은 앞서도 봤듯 낙동정맥이 아니라 비슬기맥에 솟은 것이다. 말하자면 기맥 첫 봉우리다. 거기서는 영천(북안)-경주(산내)-청도(운문) 세 지역이 나뉜다. 정맥-기맥은 분기봉서 갈리지만, 3개 시·군은 여기서 나뉘는 것이다. 지리지(地理誌) 시각서 보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상봉의 시야는 그야말로 제로다. 숲에 막혀 사방으로 깜깜하다. 오직 꼭짓점에 있는 묘가 뚜렷하고, 수북이 달린 등산객들 시그널만이 그 중요성을 대변할 뿐이다. 리본들 대부분은 낙동정맥 종주꾼들이 기념 삼아 잠깐 둘렀다 가며 붙인 것일 테다.

거기도 표석 2개와 금속이정표 1개가 섰다. 다듬어진 오석(烏石)에는 '2006. 11. 18. 북안 구룡산악회', 자연석에는 '2007. 5. 21. 청도산악회' 등이 적혀 있다. 낙동정맥에 비슬기맥까지 보태져 더 활기차진 최근의 산줄기 종주 바람을 증언하는 듯한 날짜들이다.

그 정상봉 높이는 1:5000 지도에 685.5m로 돼 있다. 그런데도 상당수 등산지도들은 683m로 안내한다.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초행자들은 분기봉을 지나 정상봉을 향해 걷던 중 눈 아래로 펼쳐진 놀라운 풍경에 놀라워하기 일쑤다. 그 높은 산꼭대기에 마을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름 하여 '시루미기'. 두 봉우리 사이 낮아진 재에서는 바로 마을 안길이 이어지기까지 한다.

이 마을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널찍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분기봉에서 남쪽으로 낙동정맥이 이어 가는 한편, 불과 5분 거리로 붙어 있는 정상봉에서도 비슷한 방향으로 큰 산줄기가 하나 내려 뻗어 그 사이에 골이 형성되는 것이다.

정상봉에서 내리닫는 그 산줄기는 밀양강 최상류인 동창천 가의 장륙산(686m)까지 이어달리며 경주와 청도를 갈라붙이는 중요한 지맥이다. 낮은 재조차 높이가 400여m에 달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고, 동창천을 만나 주행을 끝내는 순간까지 대체로 600m대를 지켜 나간다. 시작하는 사룡산이나 끝맺는 장륙산이나 공히 높이가 686m인 것도 이채롭다. 그 서편 운문면이나 동편 산내면의 산세가 저다지 당당한 것도 다 이런 산줄기 덕분이다. 이 산줄기엔 '장륙능선'이라 이름 붙여 놔 보자.

시루미기는 그 아래 도로에서조차 거기 마을이 있는 줄 눈치 채기 어렵다. 마을과 도로 사이 낙동정맥 상에 높이 603m 봉우리가 하나 솟아 마을을 가린 결과다. 신비감을 더하는 요소다.

시루미기 출신 어르신(65) 등에 따르면 1940년대까지는 그 마을에 민가가 없었다. 그 어른 가족이 700여 평의 다랑논을 개간해 들어간 게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집은 한국전쟁이 터진 후 불태워졌다. 북한군의 1950년 9월 공세로 인접 영천 북안에서 임포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빨치산이 거점 삼아 밀려오는 등 일대가 격전지가 된 때문이다. 사룡산 북편 지경재 및 고지리 인접 마을이 임포리다.

시루미기는 1970년 전후 한 신앙인이 들어가 생식마을을 일구기 시작하면서 면모가 달라져, 오늘날 40여 호 100여 명의 마을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곳 생식은 일반인이 따라하기에 쉽잖은, 이곳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하는 수준의 것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세속과 달리 약초 캐고 벌 치고 해 자급자족하며 자연과 하나 돼 사는 듯했다. 만났던 주민들은 차분하고 친절했다.

'시루미기'라는 마을 이름 중 '미기'는 재나 잘록이를 의미하는 '목'으로 짐작된다. 거기에 발음하기 쉽게 '이'를 붙여 '목이'라 하다가 '미기'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나 '시루미기'를 현지인들이 '히리미기'라고도 하니 '시루' 혹은 '히리'가 뭔지 모호하다.

산꼭대기에 펑퍼짐하게 퍼진 마을 자리가 떡시루 모습이어서 시루미기란 이름이 붙었는지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이 수련할 때 내리 친 칼에 맞아 그 마을 안 바위가 시루떡 모양으로 잘려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었다.

시루미기 마을의 물은 '직현천'(直峴川)이 돼 내려간다. 시루미기가 속한 경주 산내면 우라리(牛羅里)와 그 하류 내칠리(內七里) 등의 자연마을들이 거기 펼쳐진다. '직현'은 내칠리 자연마을 중 하나인 '곧은터'의 한자 표기다. 그 물길은 산내면 신원리에서 동창천에 합류한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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