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근(55· 상인성당 사무장)씨는 36년째 주산을 쓰고 있다. 요즘은 은행창구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주산이지만 그에게는 필수품이다. 성당에 들고 나는 돈을 계산할 때도, 각종 행사 예산을 짤 때도 주산을 쓴다. 그의 손가락이 리드미컬하게 주판알을 튕기는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대구상고를 졸업한 그는 군 제대 뒤 1978년 대구은행에 입사해 2001년 퇴직했다. 당시 은행 취직에는 주산이 필수였다. 박상근씨는 고교 졸업당시 주산 2단, 부기 2급이었다. 주산 2, 3급이면 되던 시절이니 수준급이라고 할 수 있다. 입사 초기엔 은행 내 주산 경연대회 가감산 1위, 승산(곱하기)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가 주판알을 튕길 때면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런 속도로 2시간 정도 주판을 놓고 나면 팔에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전표를 받아들면 이마 위에 주판이 딱 그려질 정도로 암산도 빨랐다.
졸업 뒤 한국전력, 대구은행, 대한항공 등 3곳에 합격했는데 대구은행을 택했던 것은 어머니의 당부 때문이었다. 당시 상고 졸업생들에게 은행은 가장 좋은 직장이었다. 자식이 은행에 취직하면 동네잔치를 열던 시절이었다. 그는 내심 한전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소망을 거스를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전이 나았을 성싶다. 한전에 입사한 동기들은 아직도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그는 일찌감치 은행에서 나와야 했으니까.
박상근씨는 중학교 시절 공부를 잘했다. 상고에 진학했던 것은 취직을 위해서였다. 보리죽을 겨우 먹던 시절이었고, 한시라도 빨리 취직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당시만 해도 대구상고, 제일여상, 대구공고 등에 진학한 학생들은 인문계(일반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들보다 평균 점수가 높았다.
상고에 다니면서도 그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영어 사전 한 권을 통째로 외웠는데, 사전을 펴서 물으면 어떤 단어라도 다 알아 맞혔다. 당시 대구상고를 함께 졸업한 친구들 상당수가 직장에 다니며 야간대학에 진학했다. 은행은 학벌을 따지지 않는 분위기여서 절반 정도만 대학에 진학했다. 박씨가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던 데는 차별 없는 은행 분위기도 한몫했지만 정규학교 공부 말고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10년 동안 매일 새벽마다 영어학원에 다녔고, 직장 선배를 통해 배우기 시작한 일어는 지금까지 30년 이상 공부하고 있다. 그는 영어, 일어, 중국어, 불어, 스페인어 등 5개 외국어를 구사한다.
70년대와 80년대 은행은 북새통이었다. 하루에 1천장 혹은 1천500장이나 되는 전표를 일일이 주산으로 확인하던 시절이었다. 첫 발령지는 대구은행 내당동 지점이었는데 월말이면 창구가 꽉 찼고 손님들은 은행 업무 처리를 위해 한 시간 이상 기다리는 것이 예사였다. 세금도 모두 은행에서 받던 시절이었고 월말이면 세금을 내려는 사람들이 은행 밖으로 길게 줄을 지어 기다리곤 했다.
요즘은 공과금 수납을 전자기계로 하는 데다가 자동이체도 많다. 또 꼭 월말까지 기다렸다가 내는 사람도 드물다. 70년대와 80년대에는 왜 굳이 매월 마지막 날까지 기다렸다가 공과금을 납부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루만 일찍 내도 그렇게 오랜 시간 줄을 지어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의 주머니 사정은 그만큼 어려웠고, '시간이 돈'이라는 개념은 지금보다 훨씬 희박했다.
일이 많았으니 은행 직원들에게 주산과 부기는 필수였다. 자격증뿐만 아니라 필기시험에도 주산과 부기 관련 문제가 많이 출제됐고, 주산과 부기에 능하지 않으면 은행 취직이 불가능했다.
은행 입사에서 주산의 중요성이 떨어진 것은 전산화가 이루어진 90년대 이후였다. 그 뒤로 주춤하던 주산이 암산과 지능 개발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한때 붐이 일기도 했지만 이내 시들었다.
◇ 배우고 나누는 삶
박상근씨는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가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다. 언제 어디서라도 공부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학위를 위한 형식적인 공부가 많은 것 같아 아쉽다. 뚜렷한 목적 없이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허다하다.
"저희 때만 해도 모두들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어디든 취직을 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비교적 편하게 성장한 탓에 이것저것 많이 가리는 것 같아요. 젊은 세대는 궂은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부모 세대들은 또 자식들에게만은 궂은일을 시키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중소기업은 사람을 구하지 못해 안달이고, 청년들은 취직을 못해서 안달인 원인을 꿰뚫어보는 말 같았다.
박씨는 중요한 것은 학위가 아니라 실력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늘 공부를 해야 하며, 실력을 키워두면, 이웃을 위해 나눌 수라도 있다고 했다. 이른바 '재능 기부'인 셈이다.
"자신이 가진 재능과 실력을 나누는 일이 중요합니다. 내가 가진 재능은 나 한 사람이 사라지면 사장되지만, 여러 사람과 공유하면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습니다."
박상근씨는 문경시청 지점 근무 당시 탁월한 일어 솜씨로 시청 공무원들에게 무료로 일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만이 브랜드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작은 회사나 심지어 개인도 브랜드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고, 인류의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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