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칼은 도검이다. 도(刀)는 베기에 편리한 날이 한쪽에만 있는 것이요, 검(劒)은 찌르기 등에 편리한 양날이 있는 칼이다.
칼은 '내공'이 장인 수준은 돼야 만질 수 있다. 칼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최소 보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데 왕초보인 기자가 칼 만들기 체험을 한다는 것 자체가 솔직히 '수박 겉핥기'일 수밖에 없을 터. 그럼에도 칼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태어나는지 일일 견습생으로 칼 체험을 결심했다.
얼마 전 내린 폭설이 채 녹지않은데다 칼바람까지 몰아치는 경북 문경 농암면의 한 폐교에 도착했다. 고려왕검연구소 이상선(56) 소장의 혼이 담긴 곳이다.
이 소장은 2007년에 노동부로부터 전통야철 도검 부문 기능전승자로 선정된 도검 장인이다. 이 소장은 40년째 전통 도검과 임금의 칼인 사인검(四寅劒) 제작 및 복원에 혼을 쏟고 있다. 단 하루 만에 칼을 만드는 자체가 무리수이지만 명장의 조수로 임명돼 칼 만들기 체험에 들어갔다.
연구소에 들어서자마자 주눅이 들어버렸다. TV드라마에서나 보아온 수많은 도검이 연구소 안에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완전무장이랄까. 머리에 두건을 쓰고, 두터운 검은 색 도복을 입은 뒤 다시 턱부터 발끝까지 길이의 앞치마를 둘렀다. 물론 장갑은 필수.
칼 제작에는 순철을 쓴다. 요즘의 순철은 제철소 등에서 칼 제작에 알맞게 직사각형의 쇳덩이로 제품화돼 나온다. 쇳덩이를 달구고, 수만 번 두드리는 반복작업(단조)이 칼 제작의 시작이다. 쇠집게로 꽤나 무거운 쇳덩이를 집어 가마에 넣었다. 나도 모르게 '컥', '억' 소리부터 내질렀다. 1천300℃가 넘는 불가마의 화기에 얼굴은 금세 타올랐고, 눈은 뜨지도 못했다. 벌겋게 변한 쇳덩이에서 나오는 불꽃이 여지없이 기자를 위협했다. 얼마나 뜨거웠으면 30초도 지나지 않아 가마에서 멀찌감치 달아나 버렸을까. 가마에 쇳덩이를 달구고, 다시 두드리는 작업은 완전 '막노동'이었다. 옛날에는 벌겋게 달군 쇳덩이를 장정 4명이 돌아가면서 두드렸지만 요즘은 현대식 기계가 이를 대신한다. 하지만 칼의 날을 세우고, 원형을 갖추는 마지막 단조는 명장이 직접 수작업으로 처리한다.
마지막 단조작업은 가마 작업보다 수월할 것이라는 기자의 예단은 확실한 오판이었다. 왼손으론 기계공정을 거쳐 엿가락처럼 늘어진 쇳덩이를 쥐고, 망치를 쥔 오른손으로 칼날을 세우는 작업에 들어갔다. 명장의 지시대로 쉼없이 망치를 내려쳤다. 왼손엔 뼈까지 저린 고통이 다가왔고, 오른손의 힘은 거의 한계를 드러냈다. 무수한 망치질 끝에도 결국 칼 한 자루를 망치고 말았다. 날을 세우기는커녕 되레 무뎌지게 만들어 버린 것.
명장의 '응급처방'으로 칼날 세우기 단조를 끝낸 뒤 폐교 안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1시간 정도의 단조 체험이었는데도 몸은 이미 파김치가 됐다. 칼의 날을 세우기까지 수만 번의 망치질을 하는 장인에게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다음 공정은 완전한 칼의 모습을 갖추는 단계. 글라인더에 전기를 넣은 뒤 의자에 앉아 단조를 마친 쇠자루의 자투리를 갈기 시작했다. 불꽃이 연방 앞치마에 떨어졌다. 쇳덩이를 갈아내는 30여분 동안, 튀는 불꽃을 참지 못하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기 일쑤였다. 글라인더 작업이 끝날 무렵 드디어 칼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푸르고, 거친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공정을 거친 뒤 숯돌에 칼날을 예리하게 세우는 것으로 1차 공정을 마무리했다.
다음은 칼집과 칼손잡이를 만드는 과정. 전문가의 손길만 허락하기에 이미 완정된 칼집과 칼손잡이에 조각과 상감을 하는 체험을 하기로 했다. 조각과 상감은 섬세한 테크닉이 필요했다. 초보자의 손은 당연히 떨릴 수밖에…. 명장의 지시대로 칼손잡이에 쓰여진 글씨를 조금씩 파 들어갔다. 한 글자를 파는 데 걸리는 시간은 꽤나 길었다. 얼마나 신경을 썼기에 조각된 글자는 기자에게 '손마비'라는 선물을 남겼다. 칼집의 겉은 주로 가오리가죽을 사용한다. 가공된 가오리가죽을 접착제를 사용해 칼집에 붙여 3일 동안 공기가 빠지도록 보관한 뒤 매끄럽게 표면을 처리한다. 가오리가죽은 칼을 부러뜨릴 만큼 견고하다. 쇠 선별과 단조, 연마와 열처리, 장식 성형, 조각과 상감, 조립 등 보름 이상의 공정을 거쳐 한 자루의 칼이 탄생한다.
공방 옆은 칼 전시장이다. 나름의 칼 만들기 체험을 끝낸 뒤 전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검과 창들이 전시돼 있었다. 반월도, 은월도 등 창들의 무게는 무려 15㎏. 겨우 들 수는 있었으나 휘두르는 것 자체가 기자에겐 무리였다. 그 옛날 장수들은 15㎏의 창을 들고 전장을 누볐다고 한다. 창은 장수만의 전유물이 아니겠는가. 옛날 장수들이 사용한 도검의 무게는 1.2~2㎏ 정도지만 역시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존재였다. 어설픈 체험이었지만 여러 공정을 거쳐 한 자루의 칼을 탄생시켰으니 그 뿌듯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칼은 종합예술품이다. 금속공예는 물론, 칼집을 만들고 장식하는 목공예, 가죽을 사용하는 가죽공예, 손잡이에 술을 다는 매듭공예까지 모두 터득해야 도검 장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이상선 명장은 16세 무렵부터 대장간이며, 청동과 함석을 다루는 공장, 장신구를 만드는 금속공예 공방, 은장도 공방, 주물공장 등을 찾아다니며 직접, 때론 어깨너머로 칼의 모든 것을 얻었다. 기본을 터득하는 데만 10년의 세월을 투자했다고 한다.
명장은 칼을 만드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칼이 가지는 정신부터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일본도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검으로 제작되는 것이라면 한국의 전통 검은 방어용이다. 또한 우리의 전통검은 나라를 지키고 사람을 살리는 검이기도 했다. 중국의 화려한 검과, 일본의 세련된 검이 있지만 정신에 있어선 우리의 것이 최고라는 것이다.
명장은 40년 도검 복원을 하면서 우리의 도검과 검법의 역사가 사라져 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5천년 역사 속에서 우리의 영토를 지킨 칼의 역사가 분명 존재했지만 조상의 얼이 담긴 칼의 역사는 병사 훈련용 책 몇 권이 전부라고 것이다. 일본의 칼 역사가 일본인들에게 강인한 정신력의 상징물로 자리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 명장은 지금 임금의 칼인 사인검 복원에 혼을 쏟고 있다. 칼의 정신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사인검은 조선의 왕들이 장식용이나 호신용으로 지녔던 검이자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신성함을 지닌 상징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사인검은 호랑이해(寅年), 호랑이달(寅月), 호랑이날(寅日), 호랑이시(寅時)에 만들기 때문에 12년 만에 제작되는 귀한 검이다.
명장은 2010년 2월 21일 오전 3시부터 5시까지 2시간 내에 열처리된 칼이 바로 사인검이라고 했다.
2월 21일 사인검이 탄생하는 그날, 도검의 혼을 잇고 있는 명장을 다시 만나겠다는 약속을 하고 일일 견습을 마무리했다.
이종규기자 jongku@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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