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의 사상적 배경을 추적하면 인조반정에 닿아 있다. 조선의 당인은 당파를 막론하고 모두 효와 충을 최고의 실천덕목으로 삼는 유학자들이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도 율곡 이이를 종통으로 삼는 유학자들이었다. 율곡 이이는 개혁적인 유학자였지만 인조반정을 주도한 제자들은 달랐다. 군부(君父)를 내쫓는 패륜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쿠데타가 역(逆)이 아니라 충(忠)이라는 명분이 필요했다.
서인들은 그 명분을 자신들의 군주는 명나라 황제이고 조선 임금은 그 아래의 제후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리에서 찾았다. 광해군의 명·청 등거리 외교가 임금에 대한 불충이니 자신들의 쿠데타가 충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조선 전기의 사대주의는 통일제국 명과 우호관계를 맺어 국체를 보존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였지만 인조반정 이후의 사대주의는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한 자기 부정이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통해 사대부 지배체제의 허약함과 모순을 목도한 조선의 피지배 계급은 새로운 사회질서 수립을 요구했다. 그 중심 요구가 신분제 완화 내지 해체였다. 그러나 성리학자들은 예학(禮學)을 성리학의 주류로 만들어 신분제 해체 요구를 억누르고 양반 사대부들의 특권을 계속 유지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 결과 조선 후기 사회는 세계사적인 흐름과는 물론 조선 내부의 흐름과도 역행하게 되었다. 모든 개방을 거부하고, 성리학 이 외의 사상을 이단으로 단죄하며, 신분제를 강화하고, 적서와 남녀 차별을 극대화하는 시대착오적인 사회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를 주도한 정당이 노론이었다.
노론과 양반 지배계급의 이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이들은 망국도 서슴지 않았다. 노론 출신 이완용의 비서였던 이인직이 조선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와 망국 비밀협상을 하면서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전(一轉)하여 일본으로 옮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조선 후기 노론이 대거 망국에 가담한 핵심논리였다. 노론에서 대거 공로작 수작자가 나온 것은 이런 세계관을 가진 정치세력의 필연적인 귀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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