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앞산의 옛 이름 되찾기

앞산은 비슬산에서 이어온 능선의 마지막 산으로 시가지 앞의 산 전체를 일컫는다. 대구 남쪽의 산을 앞산이란 명칭을 놓고 볼 때 과연 올바른지, 옛날에도 지금과 같이 불려졌을까 고민해 봤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앞산엔 공룡발자국, 건열'연흔화석, 판상절리, 주상절리, 황룡샘 같은 지형조건과 은적굴, 왕굴, 은적사, 안일사, 임휴사 등의 왕건 자취를 비롯해 토성과 산성지(山城址)같은 소중한 문화유산도 있다. 사료를 토대로 옛 이름을 되찾고 가능한 부분을 복원하는 것도 앞산에 대한 예우라고 본다.

필자는 연귀산(連龜山)과 성불산(成佛山)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여지도서, 대구읍지, 교남지를 비롯한 다수의 고문헌을 뒤져봤다.

연귀산은 부(府)의 남쪽 3리에 있고, 성불산에서 이어 온 진산(鎭山)이다. 건읍 초기에 돌로 거북을 만들어 머리는 남으로 꼬리는 북으로 향하게 하고 산에 묻어 지맥을 통하게 했으며, 산 아래에는 석빙고가 있었다. 성불산은 대구부 남쪽 10리에 있다. 비슬산에서 이어온 관기안산(官基案山)으로 옛 기우단이 있었고, 옛 성지의 석축 둘레는 3천51척(尺)이다.

그리고 이들 두 산의 주변에 대한 기록도 살폈다. 공고(工庫)'관청'빙고(氷庫)와 성황단(城隍壇)은 부의 남쪽 연귀산에 있다. 임수사(臨水寺)는 부의 남쪽 20리로 성불산에, 은적암(隱寂庵)'안일암(安逸庵)은 부의 남쪽 10리 성불산에 있다. 성불산의 고성(古城)은 수성현에 있었으나 없어졌다.

이어서 고지도에서도 찾아봤다. 대구의 남쪽에 연귀산을 표기하였다. 연귀산은 남쪽의 비슬산에서 이어왔고, 성불산은 최정산에서 이어왔다. 성불산과 임수정 사이에 월배와 조암도 표기했었다(청구도'대동여지도'동여도). 감영 남쪽에 연귀산을, 다시 남쪽으로 임수정(臨水亭)과 그 옆으로 월배와 조암이 위치한다(광여도). 대구(大丘)감영 남쪽에 구암서원, 그 남쪽에 연귀산과 임수사, 다시 남쪽 능선에서 서편으로 월배면을 표기했다(비변사인방안지도). 대구 남쪽에 연귀산이 있고, 그 남쪽에 성불산, 성불산 서편으로 월배면과 조암면이 위치한다(조선지도). 감영 남쪽에 연귀산과 성황단, 그 다음 남쪽의 능선에 임수사가 표기돼 있다(해동지도'지승).

이를 볼 때 성불산은 팔조령에서 비슬산을 거쳐 연귀산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와 동여도에선 위치상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지금의 앞산은 성불산의 위치이고, 임수사는 임휴사로 추정되며, 제일중학교 돌 거북이 있는 연귀산도 성불산에서 수도산과 건들바위를 거쳐 왔다. 지금은 많은 세월이 흘러 능선은 끊어지고, 석빙고는 연귀산 동편 암석절벽 밑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성불산의 은적암과 안일암 등의 사찰과 성불산 옆으로 월배'조암면 등은 고도의 측량기술이 없었지만 모두 비슷한 자리에 위치한다.

성불산을 앞산으로 부르게 된 경위를 명확히 알 순 없다. 다만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관기안산(案山)을 관청의 맞은 편에 있는 관청 안의 산을 안산에서 다시 앞산으로 불렀는지 또는 연귀산의 진산(鎭山)을 전산(前山)에서 다시 앞산으로 불렀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앞산이란 명칭은 마땅치 않다고 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불산은 1400년대 말의 동국여지승람부터 교남지(1940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 기록해 왔다. 다시 말하면 해방이전까지도 성불산으로 써왔다는 점에 신빙성을 두고 싶다. 아울러 유가사 뒤 비슬산의 최고봉은 천왕봉(天王峯), 조화봉 서편의 소재사 뒤 봉우리가 대견봉임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므로 이를 바탕으로 앞산을 비롯해 옛 이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성불산이 도심에 또 하나의 명산으로 부각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목포의 유달산을 떠올리듯 말이다.

권영시 대구앞산공원관리사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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