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책 읽는 밤

뉴질랜드에서 머물 때였다. 아름다운 풍광에 심취하는 것은 단기간의 여행이면 족할 듯 그곳에서의 1년은 너무 길었다. 때론 그 한적함에 유배 온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조밀함과 부대낌에 익숙한 우리는 한국 냄새가 그리웠다. 한글로 쓰인 것은 무엇이든 소중했다. 한국 업소 광고지에 인쇄된 지나간 삼류 기사까지도 쉽게 버릴 수 없었다.

도서관을 처음 찾던 날 서가 한 구석에서 뜻밖의 소득을 얻었다. 한글로 쓰인 표지의 책을 발견한 것이다. 그곳에 오기까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서가 한 면을 채운 50여권의 책들은 그때부터 우리의 허기를 달래주는 감춰둔 양식이 되었다.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 그곳을 들락거렸다.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지던 날 우리는 조금 더, 그리고 조금 더 먼 곳으로 도서관 순례를 떠났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오자 그 때의 책을 향한 열정은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저녁이면 남편은 거실에서 책 대신 리모컨을 손에 쥐고 휴대폰은 아이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가버렸다. 반에서 휴대폰 없는 아이가 두어 명으로 줄었을 때 장만해 주어야했던 애물. 드물긴 하지만 휴대폰이 없다는 중고생들을 볼 때면 그들의 부모가 대단한 분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지인이 휴대폰을 없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찌감치 집에 텔레비전도 없앤 사람이라 그것을 없앤 배경을 짐작 못하는 건 아니지만 교수직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할지가 궁금했다. 마침 그에게 알아볼 일이 생겨 집으로 연락해보니 가족이 전하길 그가 학회에 며칠간 참석했다며 이메일로 연락을 해보라 하였다. 전화라면 5분이면 될 것을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메일을 보냈다. 연락이 닿은 건 며칠 후였다. 그때는 당시의 조급함과 짜증스러움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급하다고 여긴 문제도 나름대로 해결을 본 후였다.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물건이 없어도 괜찮다는 걸 보여준 그의 용기에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내주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족쇄처럼 우리의 자유의지를 방해하고 구속하는 텔레비전과 휴대폰. 그것들이 사라진 시간에는 온전한 몰입으로 내면에 침잠하는 자유로움, 그리고 느림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달은 우리를 점점 더 게으르게 만들고 책과 멀어지게 하고 있다. 상상력과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책읽기.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기술은 개발할 수 없는 걸까.

가끔은 그 때의 적막감이 그립다. 쏟아질 듯한 별들만이 우리 곁을 지키고 있던 나날들. 함께 둘러앉아 책을 읽던 그 밤. 외로워도 외롭지 않은 밤이었다.

백옥경 경북도립구미도서관 느티나무독서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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