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남자의 자격, '카리스마' 보다 '아내존중'

맞벌이 5가구중 한 집 꼴, 아내소득이 남편소득보다 높아

'카트끄는 남자, 쇼핑하는 여자.' 대형쇼핑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남편은 '음메~ 기죽어', 아내는 '음머~ 기살어'."

남편은 작아지고 아내는 커지고 있다. 부부 사이 권력이 급하게 이동하고 있는 것. 예전 남편 중심에서 이제는 아내의 권력이 '세지는' 현상이 갈수록 두드러진다. 자녀교육에 대한 역할 분담은 보편화되는 추세고, 주말과 휴일에 자녀 육아와 교육을 도맡아하는 남편도 늘고 있다.

또 대형마트의 '카트운전사'는 남편의 몫으로 고착되고 있고, 딸(아내)은 '효녀', 아들(남편)은 '불효자'라는 말도 부부사이의 권력이동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 방증하는 통계도 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소득면에서 볼 때 1970년에는 부인보다 돈을 못 버는 남편이 4%였지만 2007년에는 22%로 크게 늘었다. 전세계 추세가 이러하다. 대한민국 역시 맞벌이 부부 중 21%가 부인이 남편보다 연봉이 더 많다.

좀 더 좁혀들어가 보자. 대구광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의 선·후배, 동료, 친·인척 중에서도 부부 권력이동은 더 이상 희귀사례가 아닌 듯하다. 가정 내 부부 권력이동 그 단면을 들여다본다.

◆가정의 파워게임 '아내 승'

유도 4단의 박승범(34·온통 간바지 칠곡점 사장)씨는 밖에서는 후배들에게 '카리스마 박'으로 옷깃을 세우고 다니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만능 맥가이버 일꾼'이 된다. 설거지, 청소, 빨래, 아기보기 등.

박씨는 "혹시 후배들이 가정에서의 내 제 모습을 본다면 그동안 쌓아놓았던 카리스마가 한순간에 무너진다"고 언론에 모습이 공개되는 것을 염려했다. 하지만 그는 가정에서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아내 양영은(30·대구보건대 행정직원)씨는 "밖에서는 남편의 기를 세워주면 집안에서 모든 일이 더 편안하다"며 "남편이 4년 전 직장을 그만두면서 제가 수입이 많아지게 됐는데 꼭 수입 때문에 집안의 권력이동이 생긴 것은 아니다"고 한발 뺐다. 하지만 표정은 남편보다 한결 여유가 있어 보였고, 가정 내에서는 승자의 모습이었다. 가정에서 보니 아들 진호(4)도 엄마보다 아빠와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대구 달서구의 한 중소기업 과장인 최무환(가명·41)씨는 최근 아내에게 가정의 '권력'을 내줬다.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2학년 두 자녀를 둔 최 과장의 경우, 혼자 벌이로 자녀에게 넉넉한 교육비를 댈 형편이 못 됐다. 동갑내기인 아내가 5년 전 전업주부를 포기하고 보험설계사로 맞벌이에 나선 것.

이후 아내의 경제력이 커지고, 가정 밖에서의 활동이 빈번하면서 이들 부부간의 권력 균형에 적잖은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순간엔가 자녀들의 교육을 분담하게 됐고, 아내의 직장일이 더욱 바빠지면서 지금은 자녀 교육, 장보기, 집안청소와 밥 짓기 등 가사노동의 기울기가 이미 자신에게 기울어 버렸다.

지난해부터는 경차인 아내의 차와 자신의 소형차를 트레이드했고, 올해 들어서는 아예 버스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가정의 경제권도 아내에게 내준 지 오래인 데다 옛날에 별로 하지 않았던 장인과 장모님에게 정기적으로 안부전화를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다.

최 과장은 "친구들이 '넌 자존심도 없냐'고 비웃을 때 속이 상한다"며 "하지만 혼자 벌어 고통받는 것보다는 아내를 위한 배려라는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편한 측면도 있다"고 했다.

◆권력이동이 가져온 부작용도 커

부부간 권력 다툼은 파국으로 치닫거나 파국 직전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김승모(35·수성구 범어동)씨는 4년 전 다니던 회사의 부도로 실직했다. 혼자 벌어 가정을 책임져온 터라 김씨의 실직은 가정에 큰 충격을 던졌다.

실직 후 재취업 노력도 허사인 데다, 2년 전 아내가 생활비 마련을 위해 남편과의 역할 교체를 요구한 것. 가정살림은 자연히 김씨의 몫이 됐지만 가정일을 해본 적이 없는 김씨에게 '가정주부 김씨'는 아내와의 갈등만 일으켰다. 김씨는 4세, 6세 두 자녀의 육아와 교육, 장보기, 밥짓기, 집안청소 등 집안일은 거의 중노동에 가까웠다고 했다.

6개월 전 대형마트에서 장을 볼 때 친구를 만나 창피를 당한 후 아내와 크게 다퉜고, '무능력한 남편'이라는 소리까지 듣자 김씨는 올 들어 전격 별거를 선언해 버렸다.

김씨는 "자녀들도 아빠보다는 엄마의 말을 더 믿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며 "당장 직장을 구해 아내로부터 권력을 되찾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남편이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가정도 갈수록 늘고 있다.

맞벌이 부부이던 정일준(51·수성구 시지동)씨는 2년 전 건강이 좋지 않아 다니던 직장을 명퇴했다. 퇴직금으로 대구 근교에 텃밭 딸린 농가주택을 한 채 마련하고 농사일로 소일한다. 밭 한 마지기 남짓한 농사는 수입날 것도 없다. 대학 다니는 외동딸 학비나 살림살이는 간호사로 근무하는 아내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

딸아이가 수험생이던 지난해 3교대 근무하는 아내는 딸아이 뒷바라지에 힘겨워했다. 자연 '남는 것은 시간'밖에 없는 정씨가 아이 밥도 챙겨주고 밤늦게 마중도 다녔다. 그렇게 살림살이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정씨는 2년이 지난 지금, 밥 당번을 도맡아놓고 하는 것은 물론 김치, 된장 담그는 일, 빨래까지도 떠안는 처지가 되었다고.

그러다 보니 어디 바닷가라도 나설라치면 자연 어시장에 들러 두리번거린다. 찬거리가 될 만한 것을 봉지봉지 싸들고 다니는 형편이 된 것. 며칠 전에는 맞벌이하는 여동생 내외가 몇 년 만에 사흘간 부부여행을 가기로 했다면서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 둘을 맡겨놓고 가버려 사흘 동안 꼼짝없이 틀어박혀 아이를 봐주고 나니 몸살이 다 났다고 했다.

파워엔터테인먼트 박대성(33) 기획실장도 자신의 벌이보다 아내가 더 많아 임신 6개월 된 아기가 태어나면 가정이나 육아일은 자신이 직접 할 각오를 다지고 있다. 박 실장은 "제 일도 중요하지만 아내가 돈을 더 많이 번다는 현실적 경제력을 고려한다면 남편인 제가 일을 그만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털어놨다.

아내의 수입이 커질수록 '두꺼워지는 목소리'. 날이 갈수록 남편들이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을 가망은 적어보인다. 2010년 우리네 집안의 풍경 스케치이다. "남자들이여, 그러나마 힘을 추슬러 고토(故土) 회복에 나서자."

이종규기자 jongku@msnet.co.kr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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